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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2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312쪽 | 372g | 133*203*30mm
ISBN13 9791164798926
ISBN10 1164798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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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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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그의 등 뒤로 놓인 서가가 보였다. 조명을 한정적으로 켠 탓에 안쪽엔 짙은 어둠이 드리워 있었다. 저 안에 무엇이 있을지 그녀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건 대개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연서는 어쩐지 형체 없는 것들에게 주시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때 이야기를 고르던 서점주인이 말했다.
“그중 하나를 들려드리죠. 아주 오래전, 기록도 남지 않았을 만큼 까마득한 옛날에 번영하고 멸망한 나라. 그곳에 살던…….”
그의 말에 반응하듯 테이블에 놓인 조명이 얕게 깜빡였다.
“분수에 맞지 않는 꿈을 꾸었던 가여운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 p.34

그녀는 곧장 짐을 챙겨 서점 출입구로 향했다. 큰길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서점주인의 호의를 연서는 극구 거절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놀라게 한 사람과 함께 걸었다가는 마음이 더 진정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서점 현관 앞에서 연서는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녀가 등을 돌리자 문 앞에 선 서점주인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잘 모셔다 주세요.”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부탁이었다. 연서는 오로지 집으로 돌아갈 생각에 그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서점에서 빠르게 멀어지던 차였다. 뒤에서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문에 비스듬히 기댄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손님, 꼭 다시 오세요. 기다리겠습니다.”
--- p.106

연서는 빗속에서 멍하니 서점을 바라보았다. 저 낡은 건 언제부터 여기 있었을까. 문득 이 서점이 바다의 부표처럼 느껴졌다. 무수히 많은 일들이 표류하고 흔들리는 가운데, 아무도 찾지 않을 이곳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손님을 기다리며 혼자였을 날이 그려졌다.
--- p.135

그는 책을 펼쳤다. 어디에도 글자가 빼곡했다. 다시 닫고, 이번엔 제일 앞장을 열었다. 백지였다. 차례로 다섯 장을 더 넘기고 나서야 내용이 나왔다. 보기 괴로워서 차마 기록할 수 없다는 뜻의 세 글자뿐이었다. 곧 글자가 먹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꿀처럼 진득하게 책장을 타고 흘러 방울졌다. 흐르는 먹물은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폭포처럼 쏟아졌다. 책 속의 모든 글자가 녹아내린 것보다 많았다. 끝없이 흘러넘쳐 서점 안으로 들이쳤다. 서주는 삽시간에 머리끝까지 잠겼다.

진득한 먹물 속에서 그는 눈을 감았다. 몸이 가라앉는지, 떠오르는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늪처럼 감겨드는 것 같기도 하고 깃털처럼 부유하는 것도 같았다.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다. 그에겐 낯설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는 검은 바다에 잠겨 과거를 떠올렸다. 무수한 파란이었으나, 이젠 단 세 글자밖에 남지 않은 내용이었다.
--- p.172

“손님을 기다렸다는 건 정말입니다. 단지 상처가 깊어서 잠들었을 뿐이죠. 저는 죽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몸이거든요. 그래요, 당신이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새 지나치게 많은 걸 알게 되신 것 같지만, 그것도 괜찮습니다. 제게도 아직 들려드리지 못한 이야기가 남아있어요. 준비해 둔 것 중에 마지막입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책에도 적지 못한…….”
그가 아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차한 이야기.”
--- p.225

분명 그녀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결과를 맞이할 줄은 몰랐다. 왜 운명은 이다지도 인간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을까. 그는 여인을 품에 안고서도 한참을 망설였다. 그녀의 삶은 유한했고 그는 영원했다. 두 사람은 다른 시간을 살았다. 그는 여인과 함께해도 된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내다볼 수 있는 게 없었다. 만약 신이라면. 사람의 삶을 뜻대로 휘두르는 신이라면 우리의 결말을 알고 있을까.
마침내 망설임을 끝낸 남자가 말했다.
「도망가자. 내가 너를 이 지옥에서 꺼내줄게.」
--- p.248

어느 날, 어느 밤, 어느 길. 가던 방향을 잃었을 때쯤 도착할 수 있는 서점이 있다. 쉬어갈 수 있는 시간은 무한정. 책을 살 필요도 없으며 원한다면 서점주인의 낭독을 감상할 수도 있다. 들어오는 데 필요한 건 약간의 각오와 휴식을 원하는 피로감. 그뿐이다. 시시때때로 변화하는 서점주인의 태도를 감당할 배짱만 있어도 충분하다.

그는 무척이나 온화한 목소리로 끔찍하고 섬뜩한 이야기들을 늘어놓는다. 그런 다음 공포를 느끼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둥, 화를 돋우는지 달래는 건지 모를 말꼬리를 붙이곤 한다. 어떤 때에는 신을 이야기하다가 또 어떤 때는 과학을 입에 담으니 종잡을 수가 없다. 그저 이야기꾼의 장난이구나, 하고 넘어가는 것이 상책이다.
--- p.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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