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는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하나도 거창하거나 대단할 것 없는, 아니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는. 이 이야기가 조금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자기 안에 숨어 있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프롤로그」중에서
“죽어야만 해.”
그 짧고 단호한 소리와 함께 곧 몸의 구체적인 감각들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감각과 감정마저도 고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이었다. 귓가에 속삭이는 죽음의 손짓만이 나를 구원해줄 해답처럼 느껴졌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켰을 때 머릿속에는 온통 죽음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내가 죽으면 슬퍼할 가족들 얼굴이 아득하게 떠올랐지만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끔찍한 고통의 무게 저 밑바닥에서 희미할 뿐이었다.
---「그리고 삶이 시작되었다」중에서
누구나 평범하게 살고 있을 때는 이혼녀가 된다거나 배우자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운다거나 셀 수도 없이 이직을 경험한다거나 불치병 걸린다거나 하는 일들이 자신에게는 일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결혼, 천당과 지옥의 기괴한 결합」중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끌어안던 우리는 어디에 있을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소중했던 시간들은 왜 다시 돌아올 수 없을까……. 사랑만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한낮의 모래성처럼 맥없이 허물어져갔다. 나는 나로 꽉 차 있었고, 그는 그로 꽉 차 있었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중에서
순간 커다란 손이 거세게 내 뺨을 내리쳤다. 마르고 구부정한 몸이 날아가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더 세게 또 한 번 뺨을 내리쳤다. 귓속에서 삐~ 하는 기계 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몽롱해졌다.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그는 온갖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밟고 다시 목을 조르다가 바닥에 내던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바닥에서 신음하며 뒹굴고 있었다. 잠들어 있던 아이가 깨어나 울음을 터트렸다. 울음소리에 깜짝 놀라 본능적으로 아이를 안으려고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충격과 공포로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절망이 앉아 있었다」중에서
“나를 팔아서 가져가라.”
“소풍 가는데 돈이 왜 필요하냐.”
“밥 먹었으면 됐지 뭘 더 먹으려고 하느냐.”
정당하게 요구해야 할 것조차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엄마는 이런 내가 짜증이 났던지 ‘등신 같은 년’이라고 불렀다. 나는 진짜 엄마 말대로 되어갔다. 엄마가 심부름이나 집안일을 시키면 언니와 여동생은 못 들은 척했지만 나는 눈치를 보다가 엄마 목소리가 커지면 벌떡 일어났다. 일을 도맡아 했고 엄마가 시키기도 전에 눈치껏 상황을 파악하고는 움직였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하는 아이, 말 잘 듣는 아이, 착한 아이. 나는 이 세상에서 사랑받지 못할까봐 버려질까봐 두려운, 그런 아이였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버려질까봐」중에서
“아니, 당신은 도대체 뭘 먹었길래 그 모양이야? 아무거나 막 먹으니까 그렇지!”
저녁 반찬으로 먹은 고추 부각이 위경련을 일으킨 것이었다. 아빠의 한마디는 엄마를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난 사람에서 퉁명스럽고 화난 사람으로 원상 복귀시켜버렸다. 아빠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빠는 왜, 언제나 중요한 순간엔 거기에 없었을까?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아빠는 엄마를 다르게 대하지 않았을까? 이웃집 아주머니가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엄마를 직접 보았다면, 그랬더라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우리를 도와주었을까? 인생의 많은 순간들은 왜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듯, 그렇게 버젓이, 우연인 듯, 운명처럼 일어날까?
---「가난은 비누에 새겨진 쥐 이빨 자국처럼」중에서
낙태 수술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자괴감과 아이를 지웠다는 죄책감에 몹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스무 살에 만난 세상은 너무 아프고 외로운 곳이었다. 시간이 흘러 새살이 돋아났지만 내 여성성의 시작은 언제나 차가웠던 그날 새벽, 쾌쾌한 냄새가 나는 여인숙에 머물러 있었다. 성인이 된 이후로도 나는 누구와도 진실하고 안정적인 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 버려지는 데 대한 두려움이 늘 앞섰다. 상대에게 맞추기 위해 연기를 했다. 내 마음이나 몸은 관심 밖이었다. 가장 아름답고 빛나야 할 젊은 날들을 도돌이표처럼 무한 반복하며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를 다른 누군가에게 갚아주며 살았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정작 나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흔들리던 시절」중에서
나는 생명을 지닌 인간으로서,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로서, 나라는 고유한 인격체로서 인정받고 싶었다. 나를 상처 입힌 것은 가난이 아니었다. ‘무엇도 가질 자격이 없는 존재’라는 존재 자체의 무시였다. 나도 먹고 싶은 것을 먹어도 되고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려줬다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었을 것이다. 당장 원하는 것을 사 주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원하는 아이에게 ‘미안해’라고 말했다면, 나도 그걸 먹을 자격이 되지만 지금은 다만 형편이 되지 않을 뿐이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이름 뒤에 ‘불행, 수치, 실패, 무기력, 좌절’ 등을 끌어다가 붙이며 나 자신을 어둠으로 몰아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도 처음엔 아이였단다」중에서
문득 시선이 닿은 곳에 끈도 다 낡아버린 빛바랜 족자가 보였다. 바람이 일기 시작했는지 족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내 바람이 돌풍으로 변했고, 족자는 떨어질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하늘을 향해 자유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맙소사! 세상의 빛깔이 달라져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춰선 듯 세상이 고요해졌다. 족자는 달라진 세상 속에서 자기만의 빛깔로 뽐내고 있었다. 그 신비스러운 빛이 사라질까봐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웠다는 듯 고유한 빛깔로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살고 싶다, 여기에서!”
---「살고 싶다, 여기에서」중에서
홍보관을 나온 이후 수차례 이직을 경험하며 내가 알지 못했던 수많은 나를 만났다. 겹겹이 싸인 자아의 껍질은 조금씩 균열이 생기다가 떨어져 나갔다. 나를 만들어낸 어린 시절의 경험이 고통과 함께 떠올랐다. 돈에 집착하는 엄마가 싫어서 나는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나는 엄마보다 더한 속물이었다. 돈이 무서웠다. 나와 가족의 불행이, 거의 유일한 친구였던 강아지 루루의 죽음이 모두 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돈은 모든 불행의 근원이면서 무고한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돈 많은 사람이 우월해 보였다. 맹목적으로 돈에 집착했다. 돈으로 나와 타인의 가치를 판단했다. 엄마는 루루를 팔아 쌀을 샀다. 엄마가 된 나도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루루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우리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엄마라는 슬픈 짐승」중에서
“엄마, 나 아빠 만날 생각 하니까 너무 기대돼!”
어느 가을날, 하늘이는 기억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만으로도 그리운 아빠를 만나게 되었다. 동물원에 가려고 집 앞으로 데리러 오는 아빠를 기다리며 아이는 내내 들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온 차가 멈추고 그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하늘이는 내가 아빠라고 알려주기 전까지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었다. 햇살이 뜨거운 날이었는데도 그는 정장 차림이었다. 그 역시 하늘이에게 번듯한 인상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어느 특별한 날의 동물원」중에서
사람들은 타로의 결과보다 자신의 느낌으로 이미 답을 알고 있을 때가 많았다. 나 역시 내 안의 어떤 느낌을 따라서 갔다. 그리고 점점 그 느낌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든 길이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삶을 어떤 힘이 이끄는 것만 같았다. 카페에서의 마지막 날 저녁에 연인으로부터 받았던 라그라스의 꽃말은 이랬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
---「당신의 친절에 감사합니다」중에서
“엄마, 나한테 왜 그랬어? 왜, 날 그렇게 살게 했어?”
엄마는 온몸을 떨며 노모를 향해 서러움을 토해냈다.?
“엄마, 엄마, 엄마!” 목 놓아 울부짖는 소녀는 오빠를 위해 학교도 포기하고 돈을 벌어야 했다. 살림밑천 역할을 톡톡히 해냈음에도 사랑받지 못했던 소녀였다. 그 소녀는 엄마의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리고 생명이 꺼져가는 엄마를 이제는 용서해야만 했다. 더는 시간이 없었다.
?“엄마, 나한테 사과해. 미안하다고 하란 말이야!”
?소녀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말했다. 미안하다는 말……, 그 말 한마디가 그렇게 듣고 싶어서……. 그것이면 충분해서…….
“엄마, 내가 다 용서할게. 잘 가, 엄마. 미안해. 편히 가, 엄마.”
엄마는 그렇게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내가 그랬듯이 엄마도 그랬다. 가장 사랑했던 만큼 가장 미웠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중에서
너무 아파서 글을 썼다. 너무나 아파서, 그래서 글을 써야만 했다. 누군가 나처럼 너무나 아픈 사람이 있다면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전부였다. 내가 글을 쓴 진짜 이유였다. 껍질 하나를 벗기고 또 벗길 때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 진심이라는 마음 한줄기에 자아는 형태를 바꿔가며 껍질과 모양새를 바꾸어버린다. 나를 안다는 것이 이리도 어려울 수가! 이제야 비로소 내 진심이 이해가 된다. 내가 써놓은 그 모든 이야기들도…….
---「이제야 비로소 내 진심이 이해가 된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