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음악, 문학과 달리 재료와 물성을 통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미술은 물성인 재료의 다양한 표현 기법을 통해 비로소 완전해질 수 있다. 음악은 소리의 파장으로, 문학은 언어로 감성을 드러낸다면 미술은 안료와 전색제 등의 물질을 통해 소통한다. 회화는 각 장르마다 각각의 포수법, 전색제, 마감재까지 일련의 유기적 관계 안에 있기 때문에 재료 기법이 양식을 결정하는 주요소가 된다. 조선의 초상화는 왜 비단이었으며, 왜 서양은 유화였고 동양은 교화였는지, 왜 서양에는 먹이 사용되지 않았는지 등 의문은 많다. 중국의 수묵화사는 유연묵의 발견에서 근거한 것으로 재료가 양식을 결정한 좋은 사례이다. 재료 기법의 근거와 발전 과정이 배제된 미술사는 온전하다고 할 수 없다.
---「머리말
동양화와 서양화를 막론하고 전통 회화는 화가가 직접 안료와 전색제, 물의 농도와 양을 가감하여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내는 창의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매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색료를 만들 수 있었으므로 재료를 다루고 기법을 연마하는 수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산업혁명 이후에는 대부분이 새롭게 만들어진 튜브물감을 주로 사용하게 되면서 편리함을 얻은 대신 표현력에서는 물론 보존적, 미학적 측면 등에도 한계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제1장 안료
청색은 오행 철학으로 볼 때 방위로는 동쪽이고 오행 중에 나무이며 계절로는 봄에 해당된다. 청춘이라는 말도 여기에 기원한다. 청색을 내는 천연 안료는 무기 안료인 석청과 군청이 있고 유기 안료로는 남이 대표적이다. 천연 석채(광물성 안료)인 석청과 군청(천연 울트라마린 블루) 외에 스몰트, 마야 블루, 이집션 블루 등이 있지만 이것들은 고대 안료로서 현재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남은 쪽에서 채취한 천연의 식물성 안료로 고대로부터 많이 애용되어 왔다. 신석채로 역시 석청과 군청이 있는데 호칭의 혼선이 있을 수 있으니 신석청(新石靑)과 신군청(新群靑)으로 칭하기로 한다.
---「제1장 안료」중에서
전색제와 바탕재는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선택을 자유로이 한다면 굳이 동/서양화의 경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재료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습득만 있다면 회화적 차원으로의 통합과 확장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옆의 도판은 장지에 청분과 황분으로 중색 기법을 하고 그다음 적분으로 다시 중색을 했다. 그리고 제일 안의 적색은 교를 빼고 물만으로 채색했다. 즉, 감교 기법이다. 전통의 교화는 이렇게 교의 유무만으로 다양한 공간을 만들어주는 매우 기능적인 회화이다. 수입품만 좋은 것으로 여기고 우리 안의 장점을 모르고 무시하거나 폐기하는 것은 스스로에 대한 예우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러한 전통의 장점을 잘 활용하여 우리만의 독특한 창의적 회화의 지평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제1장 안료」중에서
먹(墨)은 전통 회화의 매우 중요한 재료로서 안료와 염료의 성질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서법은 물론 염색과도 관계가 깊다. 서양에는 없고 동양에만 존재하는 특수한 재료이므로 먹에 대해 이해하면 동서양의 세계관 혹은 미학적 차이를 자연스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먹은 단순히 화재(?材)로서의 물리적 기능 이외에 물성 그 자체가 고도의 정신적 의미를 지님으로써 ‘수묵(水墨)’이라고 하는 극도의 형이상학적인 회화 양식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성향이 지나치게 절대화되고 편중됨에 따라 가장 기본적인 먹의 물성은 오히려 간과된 경향이 있다. 먹의 기본 단위인 탄소의 초미립자적인 성질이나 탄소를 응집, 확산시켜주는 교(膠)에 대한 이해 없이 단지 고도의 정신성 하나만으로 먹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것은 균형감 있는 참된 수묵의 조건을 갖추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균형을 상실한 집착이 곧 현대의 많은 작가들로 하여금 아크릴 물감 혹은 액상 먹과 같은 ‘합성수지 + 카본 블랙’의 저급 재료를 사용하고선 ‘수묵화’라 여기며 수묵의 지고성(至高性)을 주장하는 모순까지 낳게 되었다. 수묵화는 채색화와 함께 교화(膠畵)의 한 양식이다. 교라는 전색제를 제외하면 수묵도 채색도 그 정체성을 지니지 못함은 당연한 것이다. 기름을 전색제로 사용하면 유화가 되듯이 아크릴 수지를 전색제로 사용하면 아크릴화가 된다. 이는 교화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회화 양식이다. 아크릴과 같은 합성수지 전색제를 사용하면 결코 수묵화가 될 수 없으며 다만 ‘흑백화’ 혹은 ‘단색화’에 지나지 않는다. 먹이라는 재료의 물성을 고려하지 않은 ‘수묵 지상주의’는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 할 수 있다. 수묵의 개념 역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이해와 긍정에서 출발할 때 비로소 수묵화가 전통의 그림자가 아닌 우리 시대의 건강한 예술 형태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제2장 먹」중에서
한중일 삼국은 먹 문화를 공유하는 동시에 각자의 독자성을 지니고 발전시켜 왔다. 고려의 종이와 먹이 매우 우수하여 북송의 문인이자 서화가인 소식(蘇軾, 1037~1101) 역시 찬사를 멈추지 않을 만큼 중국에서도 그 이름이 높았다고 하나 현재 우리의 먹 문화는 화려한 과거에 비해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먹을 제대로 이해하고 새로운 먹 문화를 세우는 것이 부박한 이 시대에도 절대 필요하다. 웰빙과 힐링의 핵심을 지닌 먹 문화는 오랫동안 우리 안에 표현과 소통의 도구로서 크나큰 역할을 해왔으며 소통 부재의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필요불가결의 정서이므로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되어야 한다.
---「제2장 먹」중에서
재료 전문가로서의 미불의 이러한 면모는 우리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이러한 부분에서 우리는 미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에 큰 맹점이 있음을 깨달아야 하고, 또한 우리의 미술 교육에 대한 반성을 촉구해야 한다. 이제라도 미불의 문인화가로서의 철학적 예술성만 주시할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은 재료에 대한 지식과 용법에 대한 실험적 연구들에 대해서도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다. 진정 참된 예술은 주객이 치우침 없는 만남에 깊이 몰입할 때 이루어지는 것임을 여기서 통감하게 된다. 동양 회화를 전공한 작가라면 이러한 미불의 태도를 통해서 법고창신(法古創新)하는 자세를 배워야 할 것이다.
---「제2장 먹」중에서
붓은 인류사에 있어서 기록을 통한 전승을 가능하게 해준 매우 의미 있는 도구이다. 현대의 필기구와는 조금 다른 차원의 기록용 도구이므로 오랜 숙련과 습득을 통해 문사(文士)나 화가의 신체 일부가 되어 심중의 언어를 전달하는 데 가장 적합한 도구로 사랑을 받았다. 특히 동양의 붓은 서양의 붓과 달리 밀도 높은 표현성과 뛰어난 유연성을 지니고 있어 여러 차원의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는 독특한 도구이다. 붓 한 자루로 만 가지 표현이 가능하다는 점 역시 서양의 모필과는 다른 점이지만, 가장 강력한 차이점을 든다면 역시 단순 도구가 아닌 화가 신체의 일부로 육화/체화되어 심상(心想)과 기운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이는 서예나 사군자 등의 회화가 ‘기운생동(氣韻生動)’을 통해서 표현의 확장을 시도하는 예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쉽게 수긍이 가는 일이다.
---「제2장 먹」중에서
물감은 안료와 전색제의 결합이고, 안료는 고급과 저급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회화가 동일한 안료를 사용한다. 따라서 회화의 장르는 전색제에 의해 정해진다. 한국화의 전색제인 교에 대해 살펴보기 전에 일반적인 회화에 사용되는 바인더(Binder)와 전색제(Medium), 바니시(Varnish) 등의 재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회화의 장르로서 대표적인 것은 벽화, 교화(膠畵), 유화, 템페라, 수채화, 크레파스화, 아크릴화 등이다. 벽화는 습식 벽화와 건식 벽화가 있는데 습식은 유일하게 전색제가 없는 회화 양식이다. 건식 벽화의 경우에는 기름이나 교, 달걀노른자 등 지역적 특성에 맞는 전색제가 사용되었다. 수묵화나 채색화 등 교화의 전색제는 아교이고, 유화는 건성유, 템페라는 난황, 수채화는 아라비아 검, 크레파스, 크레용, 파스텔은 왁스 그리고 아크릴은 아크릴 수지이다. 이 중에서도 역사상 가장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되어 온 회화 장르는 교화와 유화일 것이다. 이와 함께 템페라, 수채화 등의 기타 장르 역시 회화로서의 검증이 완료되었다. 아크릴화만이 산업혁명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직 검증이 되지 않은 회화의 장르이다.
---「제3장 교」중에서
회화의 바탕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반드시 표면 처리를 해야 한다. 종이나 천(견/아사/면) 등의 바탕재의 흡수력이 너무 강하면 안료를 제대로 적용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풀을 바르거나 작은 구멍을 메워서 바탕(Ground)이라고 하는 중간층을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다음에 따라올 채색층을 정착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중간층을 만드는 작업을 포수(Sizing 혹은 Binding)라 한다. 다시 말해 포수란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바탕재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바탕으로 전환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포수를 하지 않으면 어떤 바탕도 회화의 바탕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만큼 포수란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건축물의 경우 견고하고 안정적인 건물을 지으려면 땅을 파서 자갈을 까는 등 기반을 단단히 다지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림도 건축과 같아서 기초가 잘 되어 있을수록 견고해지고 보존상 매우 우수한 그림이 될 수 있다. 기초가 튼튼한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바탕을 견고하게 만드는 포수 과정부터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제3장 교」중에서
어떤 화면이든지 포수 처리를 하면 회화의 바탕이 될 수 있으므로 그 위에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인데, 어떤 바탕 위에 그리더라도 전색제에 따라 그 회화의 장르가 정해져야 한다. 가령 청바지 위에 그림을 그릴 경우 바지를 포수하고 나서 안료와 기름으로 그리면 유화가 되고 안료와 아교로 그리면 교화(채색화)가 될 것이다. 이제 회화는 전색제(재료)를 기준으로 한 명칭으로 구분되어야 옳은 일이다. 즉, 기름을 쓰면 서양화가 아니라 유화라고 불려야하고 교를 쓰면 교화라고 불려야 한다. 채색화와 수묵화는 교화의 세부 명칭에 불과하며 통칭인 교화로 불리는 편이 합리적인 듯하다. 재료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면 동서양화의 관념적 구분을 극복하고 회화의 통합적 차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 다만 전통 회화의 맥을 잇는 양식의 한국화는 자생성과 정체성을 확보하고 양성하기 위해 별도의 영역으로 두는 것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서의 전통 회화 기법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
---「제3장 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