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다성악(多聲樂, Ployphony)이다
시편을 이야기하기에는 마당이 너무 좁다
시편은 구약성경의 율법서나 예언서에 비해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본문 내용을 다시 말하기가 쉽지 않은 책이다. 시편을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이야기해 달라는 주문도 무리였고, 거기에 응답한 스토리텔러들의 응답도 무리였다. 그것은 시편 자체가 지닌 운문으로서의 성격뿐만 아니라 150편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을 이야기 형식으로 말하는 것도 스토리텔러에게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의 현재 형태의 책 부피는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을 기준으로, 편수가 150편이나 되고, 절수가 2,527절이나 되는 방대한 책이다. 시편이 짧은 책이라면, 이를테면 15편 안팎의 시를 편집한 정도의 책이라면, 스토리텔러들은 마치 시인 자신이 독자의 시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작 여담을 하듯, 기꺼이 시인의 심정이 되어, 그런 시를 짓게 된 배경이나 동기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주제에 어떤 낱말이나 표현이나 문체를 선택한 사정을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토리텔러에 따라서는 어떤 한 시편을 읽고 평설을 쓰듯 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상되는 독자의 반응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전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150편이나 되는 시편에서 이런 스토리텔링을 하려면 편집기획 단계에서부터 미리 정해진 분량이나 방법을 전면적으로 재고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이 총서에 이미 나와 있는 다른 스토리텔링 성경들과의 균형이 깨어지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가운데 스토리텔링 성경 시편이 최종 모습으로 나왔다. 어려운 작업을 무난하게 수행한 작가들의 노고에 찬사를 보낸다.
시편을 소개하는 스토리텔러들
시편의 각 시가 지닌 내용 파악에 중점을 둔 것으로는 해설 성경이 있고, 더 전문적인 것으로서는 각종 주석이 있다. 그러나 시를 이야기로 말하는 성경은 아직은 생소하다. 오랜 각고의 노력 끝에 우리말 스토리텔링 시편이 독자들에게 선을 보였다. 시편을 소개하는 개론 부분은 분량이 방대하고 설명이 상세하다. 대단히 학구적이다. 거의 주석이 다루는 내용과 분량에 가깝다. 이 정도면, 시편을 감상할 일반 독자들에게는 충분한 정보다.
해설과 묵상
시편 본문 제시에 이어 해설과 묵상이 나온다. 시의 구조, 시의 내용 요약, 본문의 역사적 배경, 시의 저작 연대 등이 제시되어 있다. 스토리텔러가 독자들과 만나는 마당은 여기까지다. 스토리텔러의 이야기를 다 듣고 시편 각 편의 시가 충분히 이해되었다면, 이제 독자는 스토리텔러에게 더 의존하지 말고, 독자적으로 개별 시편을 묵상하는 가운데, 각 시와의 대화를 시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시에 따라서는 독자에게 아무런 감흥이 없는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아무런 감흥이 없는 그대로, 이런 시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들어갔을까를 물을 수도 있다. 혹시 독자 개인이 용납할 수 없는 편견이 묵상하는 시 속에 들어 있다면, 이게 가당키나 한가, 하며 도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계기 되어 성경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갈 때 새롭게 들려 오는 말씀을 만날 수도 있다. 묵상이 그만큼 깊어지기 때문이다.
묵상을 위한 자료
예를 들어보자. 고라 자손의 시, 시편 47편 9절에서 보듯이, 하나님께서 왕으로 즉위하는 신년 축제 즉위식 행사에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 통치자들도 예루살렘으로 몰려온다(시 47:9a). 고라 자손의 노래는 이방인 통치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곧 우리 주님의 백성이 되려고 다 함께 모였”(시 49:9b)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방 백성 통치자가 와 있는 행사 현장에서 찬양대가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 부르는 고라 자손의 노래 가사 중에는 세계 만백성을 폄하하는 내용이 있다.
3 주님께서는 만백성을 우리 발아래 엎드리게 하셨고
뭇 나라를 우리 발아래 무릎 꿇게 하셨도다.
4 주님께서 우리에게 살 땅을 골라주셨으니
그러므로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이 큰 영화를 입었도다.
(시 47:3-4)
독자에 따라서는 이 본문이 불편할 수도 있다. 신년 축제 행사에 참여한 외국 귀빈 왕들은 이스라엘에 항복한 패전국의 왕들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서 원주민을 몰아내고 그 땅을 차지하였으면 죄송해도 모자랄 판에 “그분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야곱이 큰 영화를 입었”(시 47:4b)다, 라고 노래하는 것은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 유랑하는 이웃 백성을 두고서는 못할 소리다. 성경 안에는 고라 자손의 이 소리 말고 다른 소리는 없는가? 있다. 예언자 이사야의 소리다. 온 세상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물밀듯 몰려온다. 왜?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고,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선포될 것이기 때문이다.
(쉬운말성경, 사 2:3b).
세계가 이스라엘에 항복해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나서서 민족들 사이의 분쟁을 판결하시고, 나라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셨기 때문에, “사람들마다 자기 칼을 두들겨 쳐서 보습을 만들고, 백성들마다 자기 창을 두들겨 쳐서 낫을 만들”었기(쉬운말성경, 사 2:4a) 때문에, 그래서 더는 전쟁이 없고, 평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세계가 예루살렘으로 온 것이다. 또한 하나님이 왕으로 등극하는 날은 심판의 날일 수도 있기에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마저 버리실 수 있는 날이다(사 2:6a). 성경은 다성악(多聲樂 Ployphony)이다. 성경 독자마다 서로 다른 소리를 듣고 응답할 수 있다.
- 민영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역임,대한성서공회 번역실장, 총무 역임,세계성서공회연합회 번역컨설턴트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