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나는 ‘노동자’는 ‘인간’이 아니라 ‘사자’라는 생각을 한다. 원형 경기장에서 가망 없는 싸움을 벌이면서도 삶의 희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자, 생산이라는 거대한 경기에서 피 흘리며 죽어나가는 슬픈 운명에 처한 사자, 살인 같은 죽음에 ‘범죄’를 따질 수 없는 사자, 죽음 판을 벌인 인간에 대항하여 온몸으로 맞서 싸우면 포악하다고 불리는 사자, 인간이 싸우라고 만든 경기장에서 그에 따라 치열하게 싸우면 형벌을 받는 사자. 죽음, 박봉, 과로, 해고는 경제성장이라는 거대한 게임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법칙이고, 거친 바닥에 무뎌진 발톱을 내보이면 당장 포악함의 죄를 물어 갇히거나 칼을 받게 된다. 더러 있지 않았나. 기업이 노동을 죽이는 것은 불가피함이고, 노동이 기업에 죽을 듯 달려드는 것은 곧 범죄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자가 무리를 지어 경기장을 무너뜨리고 나오길 꿈꾼다. 경기장 안에 길을 열고 바깥길도 내는 방법을 고민한다. 거친 발톱끼리 손잡는 기적을 기다린다. 공감과 연대의 힘도 믿는다. 인간과의 연대도 기대한다. 여럿이 같이 가면 길이 된다, 그렇게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글을 썼고, 그 글들을 이 책에 모아두었다.
---「14~15쪽, 들어가며」중에서
‘죽을 각오’는 수사나 말장난이 아니다. 온몸의 기운을 다 빼낼 만큼, 영혼까지 끌어내야 제대로 일한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런 만큼 ‘자신의 노력 탓’의 공간이 늘어난다. ‘죽을힘’에서 멀어질수록 네 처지는 점점 궁색해진다는 것이다. 지금 일하면서 불행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부드러운 숨쉬기와 매끈한 이마 때문이다. 모름지기 일한다는 사람은 진이 빠지도록 밤새워 일하고, 일터의 위험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이렇게 일터의 ‘사즉생’은 장시간 노동과 산업재해를 온전히 일하는 자의 몫으로 내재화시킨다. 따라서 죽을 각오는 비대칭적이다. 죽을 각오를 하거나 권하는 사람 중 죽은 사람은 드물고, 그런 각오의 압력 속에 선택의 여지 없이 묵묵히 ‘살려고’ 하는 사람들은 죽는다. 죽을 각오로 일하라고 해서 ‘죽을 만큼’ 일하면 소리 내기도 힘들기 때문에 소리 없이 죽는다.
---「41~42쪽, 1부 〈“죽을 각오”를 권하는 사회〉」중에서
대통령은 너나없이 산재 사망자 수를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사망자 수는 거의 줄지 않았다. “우리가 김용균이 다”라고 목소리를 높였으나, 지금도 매일 3명의 김용균을 저세상으로 보내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안녕하다. 목표 달성은 난망하다. 묘책이 없다고도 한다. 당연하다. 가진 것을 모두 쥐고 있으면서 ‘죽음의 일터’를 막을 묘책은 없다. 일터의 안전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사실 손실도 아니다. 위험을 저당 잡고 누리는 잘못된 이익을 바로잡는 일이다. 따라서 정부는 과감해야 한다. ‘경제 기여’라는 자의적 잣대로 기업에 관대해져서는 안 된다. 산업안전에 대한 투자는 기술투자만큼 중요하다. 정부가 장려하고, 필요하다면 강제할 일이다.
정부만의 일도 아니다. 동료의 안전을 위해 나서자. 일터가 잠시 중단되는 불편도 마다하지 말자. 혼자 하기 힘든 이런 일, 같이 하자고 만든 것이 노조다. 선연한 핏방울 앞에서 작업복 색깔의 차이를 내세울 수는 없다. 소비자도 할 일이 많다. 내 아파트에 안전사고가 생기면 건설사에 항의하자. 나의 보금자리에 억울한 원혼이 떠돌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구 거칠게 따지자. 그리고 그 못난 ‘신성한 노동’을 내세워 학생들을 사지에 내몰지 말자. 죽을 위험을 감수하고 묵묵히 일하는 것이 어찌 어른이 되는 길인가. 거대한 공동의 묵인을 끝낼 때다.
---「50~51쪽, 1부 〈거대한 공동의 묵인〉」중에서
틈만 나면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를 되돌려 보려는 사람들이 많다. 8시간 노동의 봄이 유독 더디게 오는 한국의 정치인들은 종종 말한다. 노동시간 규제는 “국민에게는 마음껏 일할 자유”를 빼앗는 행위이며, “이제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 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했다. 이른바 “노동자유계약법”의 시대. 8시간 노동이 ‘다가오는 꿈’이 아니라 아예 ‘잘못된 꿈’이라는 것이다. 몇 년 전에는 4차 산업혁명을 고민한다는 위원회에서 주 52시간 초과 근로 금지 제도가 “개인의 일할 권리를 막”고 혁신을 저해한다고 했다. 똑같은 4차 산업혁명일진대, 태평양 건너 저쪽에서는 ‘장시간 노동’이 혁신을 막는다고 하고, 이 나라에서는 그것의 부재가 혁신을 해친다고 한다. 이제는 정부가 아예 장시간 노동을 장려하는 법까지 만들겠다고 나섰다.
“일할 권리”는 대체 무엇인가. 노동권이란 통상 나라가 국민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관련 직업 능력을 획득하도록 도와주어야 함을 의미한다. 미국에서는 기이하게도 일할 권리가 노조 활동을 제한하려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는 실업의 위협에서 국민을 보호하기 위함이다. 장시간 노동이라는 해괴한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직원들이 원해서 한다는데 자칫 사장이 보고 싶어 하는 현실이기 쉽고, 그것이 바로 노동시간 규제의 이유이기도 하다.
---「64~65쪽, 2부 〈8시간 노동의 험난한 여정〉」중에서
디지털 시대에도 건설 공사는 계속된다.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어이없이 떨어지고 부딪힌다. ‘노동의 미래’의 노랫소리가 부쩍 높았던 4~5년 전 어느 날, 철교에서 작업대 발판 지지대 철거 작업을 하던 이가 떨어져 죽었다. 나이는 겨우 29살, 추락한 높이는 불과 5미터다. 디지털 세상의 재생복구 기능은 여기서만 예외다. 그들을 다시 이승으로 데려올 방법은 없다. ‘어제의 노동자’들이 없는 ‘노동의 미래’는 불모지의 사이버 공간일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노동의 미래’에는 ‘어제의 노동자’가 가득하다. 오손도손 가족이 모이는 명절을 앞두고 임금체불 소식이며 산업재해 소식은 여전하다. 날짜를 지운다면 언제 적 얘기인지 알쏭달쏭할 지경이다. 다만 그때는 기름 냄새 확 나는 신문에서 읽었고, 지금은 소파에 누워 부스스한 눈으로 스마트폰에서 읽을 뿐이다.
---「73쪽, 2부 〈노동의 미래와 어제의 노동자〉」중에서
울타리 치기는 이제 대유행이다. 공기업과 사기업의 구분도 없다. 심지어 정부기관마저도 울타리 치기에 나섰다. 해양수산부 직원이 선주협회로 버젓이 옮겨가는 관행을 통해 정부가 울타리 관리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울타리 지키기는 인간의 목숨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수백 명의 학생이 죽어도 울타리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화장실과 같은 공간에도 예외가 없다. 청소용역은 가장 변두리에 있는 울타리 치기다. 온 천지가 울타리다. 있는 울타리는 더 나누고, 비워진 곳에는 울타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청년들이나 이미 그곳에서 쫓겨난 이들 앞에 약속된 들판은 없다. 울타리 숲만 무성하다. 그 앞에는 현수막 하나 걸려 있다. “여러분 힘내세요, 대한민국이 응원합니다.” 나는 다시 《유토피아》를 읽는다.
---「116쪽, 3부 〈우리 시대의 울타리 치기〉」중에서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은 돌부리에 걸려 주춤하다 다시 제 길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실증연구에 따르면, 한번 실직하면 또다시 실직할 위험이 높아지고 그러다 보니 실직 경험자의 소득 수준과 안정성은 오랫동안 현저히 떨어진다. 인생 역전은 힘들다. 더 넓게 보자면, 실업은 노동자의 숙련과 경험을 잠식하여 경제의 잠재생산력을 줄이고 노동소득 감소를 통해 총수요도 줄인다. 이렇게 잠식된 경제는 역시 쉽사리 회복되지 않는다. 게다가 실직의 정치적·사회적 효과도 무시 못 할 정도다. 실업은 이혼율과 범죄율을 높이고 사회적 갈등을 악화시키며 노동자의 사망률을 높인다는 연구도 있다. 실직의 영향은 이렇게 장기적이고 포괄적이다. 돌부리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개울 위 다리에서 떨어지는 것에 가깝다. 경제위기로 큰 비용을 치르고 새삼 깨달은 교훈이다. 이런 효과를 고려하지 못해 그간 정책 반응이 소극적이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높다.
---「132~133쪽, 3부 〈일자리의 진정한 가치〉」중에서
우리는 왜 바이러스와 싸우는가. 생명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 싸움에서 삶이 위태로워지는 사람들을 지키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사람 사이에서 퍼지지만 그 바이러스와 싸우면서 만들어진 신종 바이러스는 물처럼 퍼진다. 마치 홍수 같다. 높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대신 이 바이러스는 낮은 곳으로 흘러 처절하게 적신다. 한 치의 틈도 남기질 않는다. 갑작스레 덤벼드는 물벼락처럼, 또는 목 위로 차오르는 수조의 물처럼. 때론 비명도 내질 못해 이렇게 죽고 나서야 안다. 내가 아는 가장 무서운 바이러스다.
---「171쪽, 4부 〈또 다른 바이러스〉」중에서
늦은 여름비가 쏟아지는 날, 책을 덮는다. 역병의 시대란 “낮이고 밤이고 어느 인간이나 비겁해지는 시간”이다. 두려움과 공포와의 싸움이다. 부유한 자는 부족함이 없었고, 가난한 자는 기댈 곳이 없다. 누군가는 떼돈 벌 궁리도 하고, 또 누군가는 도시를 홀로 빠져나가려고 한다. 의사 리외는 늘 흔들리면서도 굳건했다. 그래서 종교와 거침없이 불화한다. “성자들보다는 패배자와 더 연대감”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이념과 이해를 자양분으로 삼는 영웅주의와도 멀리하면서 그의 눈은 오직 “단 한 명의 인간”에만 향해 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종교적인’ 사람은 의사 리외다. 그는 왜 역병과의 싸움에 자신이 나서야 하는지를 묻고 고뇌한다. 답을 멀리서 찾지 않았다. 답답해서 창문을 열자 도시의 소음이 몰려왔다. “가까운 공장으로부터 짧게 반복되는 날카로운 기계톱 소리”, 그 소리에서 그는 깨닫는다. 인간의 확신은 확성기를 통해 터져나가는 ‘구원의 진실’이 아니라 바로 저 “매일매일의 노동”에 있다. 그리고 그 노동이 가져다주는 ‘구원’. 카뮈는 말한다. “페스트 시대의 종교는 여느 때의 종교일 수 없다.” 콜레라 시대에도 유효한 얘기이고, ‘코비드19’라는 암호명 같은 이름을 가진 바이러스 시대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186쪽, 4부 〈카뮈, 역병시대의 종교와 의사〉」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가 시작되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경제 방면의 책’을 쓰고 가르쳤던 사람은 많았으나, 위기를 예상하고 경고한 사람은 적었다. 너무 적어서 찾아내기가 수월했고, 숫자를 열렬히 사랑하는 경제학자는 정확한 수치 12명을 확인하고 이를 논문으로 남겼다. 무너지고 또 무너졌다. 기업이 무너지는 것보다 일자리가 더 빨리 무너졌다. 순식간에 2,200만 명의 실업자가 생겼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맹점이 드러났고 불평등 확대가 그 근저에 있는 것이니, 이번에야말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번에는 다르다”는 문학적 메타포가 경제의 상상력을 끌어올렸다. ‘이번에는’이라는 단어는 마치 디스토피아와 유토피아를 경계 짓는 마법의 주술 같았다. 하지만 문학적 마술을 차용한 경제학의 현실은 금융시장의 버블, 공기 방울이었다. 현란한 찰나가 끝나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거품이 터지며 나는 ‘펏’ 하는 소리마저 나지 않았다.
---「222~223쪽, 5부 〈“경제 방면”의 책을 읽다〉」중에서
10년이 넘어 다시 찾아온 이번 위기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었다. 중국 어디선가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세계를 순식간에 덫에 가둘 줄은 몰랐다. 자신이 빚어낸 잘못이 아니어서였을까, 경제정책은 이번에는 좀 더 과감했다. 재정적자나 물가를 걱정하지 않고 유례없이 자원을 총동원해서 일자리와 소득을 지켰다. 덕분에 경제적 손해는 컸지만 삶의 고통은 덜했다. 물론 이런 ‘어둠 속의 빛’ 같은 일도 빛을 낼 여력이 있는 나라에서나 가능했다. 이미 빚에 허덕이고 재정이 바닥난 개발도상국들은 엄두를 내질 못했고, 선진국들의 도움은 입으로만 전해졌다. 특히 저소득 국가에서는 바이러스가 경제와 삶을 가혹하게 지배했다. 세계가 등대 불빛을 따라갔으나 도달한 곳은 달랐다. 방향을 알아도 배를 움직일 힘이 없었던 나라들은 암초에 걸려 아직 벗어나질 못했다.
그리고 2022년 가을부터 다시 비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또렷이 보이고 모두 이구동성으로 외친다. 마치 서서히 빠지는 늪 같다. 인간이 여기저기 싸움판을 만들어서 이 지경까지 왔다. 빠지는 줄 뻔히 알고 있지만 안간힘을 쓰면서 더 빠져든다. “정책의 시간”이 다시 왔으나 초라한 옛 기억뿐이다. 난해한 개념과 복잡한 통계에 ‘과학’의 이름을 입혔지만, 그 내용은 단순하다. 늪에서 당장 빠져나올 수는 없으니 이 늪의 끝 어딘가 있을 단단한 흙바닥까지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이자율 상승이라는 무거운 추를 우리의 몸에 꽁꽁 묶어서 불황이라는 늪으로 내려간 뒤 끝내 살아남은 자들이 바닥을 딛고 올라오는 날을 기다린다. 늪에 빠져 아우성인 사람들에게 밧줄을 던져줄 생각은 없다. 밧줄을 던지는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신념 때문이다. 울프 소설의 남편 친구가 말했듯이, 서풍이 부는 날에는 등대로 갈 생각조차 말아야 한다.
---「239~240쪽, 5부 〈등대로 함께 찾아가려면〉」중에서
내가 한심스러울 때가 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고 남들도 그러리라 여기면서 어물쩍 넘기지만, 오늘처럼 온갖 차별의 해악을 설파하는 ‘반차별의 전도사’ 노릇을 하다가 사무실로 돌아오면 창문 밖을 한참 바라보게 된다. 나도 어찌할 줄 몰라 하는 것들을 단호한 언어에 담아 말하고 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후유증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남들 좋다는 대학에 다녔고 게다가 남자였으니, 차별이 뭔지를 몰랐다. 그런 온실을 떠나 외국에서 밥벌이하다 보니 차별의 설움이 목청까지 차오르는 일들이 생겼다. 물론 하찮은 언어능력 때문에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들어 상대가 잘 들으라고 소리 높인 것을 나는 짐짓 차별이라고 화를 내는 부작용이 더러 있긴 하지만 차별은 이곳의 공고한 일상이다. 하지만 고백건대, 내가 겪은 차별은 깃털보다 가볍다.
---「266~267쪽, 6부 〈차별하지 않는다는 네게 묻는다〉」중에서
내가 태어난 곳을 떠난 지 25년이 지났다. 대략 삶의 절반을 유럽이라 불리는 바깥에서 보낸 셈이다. 고국이라고 하지 않고 ‘태어난 곳’이라고 한 것은 고국이라는 단어가 딱딱하고 준엄하여 영영 돌아가지 못할 곳이라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고국이라고 말하고 나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곳. 고향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그곳에서 살 때도 옮겨 다녔다. 지금은 사천이 되어버린 삼천포에서 10년, 부산에서 10년, 서울에서 10년을 보냈다. 내 피를 당기는 곳을 고향이라고 한다면, 내 고향은 여전히 순환하고 있다. 덕분에 몸은 떠돌고 마음은 부산하다. 곤란한 일도 많다. 바깥에 산다고 해서 바깥 사정을 묻는 경우가 그렇다. 내가 하는 일과 관련된 것이라면 전문가 후광을 끌어다가 어찌 해보겠지만, 복잡하고 넓은 세상사를 물어오면 난감하다. 유럽의 정치 상황은 나도 여느 한국 사람처럼 인터넷이나 언론을 통해 안다. 유럽 뉴스를 한국 포털에서 듣기도 한다. 간혹 세세한 사정을 물어볼 사람이 있다는 정도가 바깥살이의 이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정보가 신통치 않거나 틀린 경우도 적지 않다. 유럽 정치의 민감한 내막은 유럽 친구들도 잘 모른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친구라면 정보의 편향성도 감수해야 한다. 사정이 이러해서 잘 모르겠다 하면 묻는 쪽은 성의가 없다고 섭섭해할 터라 짐짓 아는 척하기도 한다. 또 그런 어정쩡한 답을 저쪽에선 대단한 것인 양 고마워할 때 나는 속수무책 뒷머리만 긁적인다.
---「271~272쪽, 6부 〈유럽에서 소심하게 묻는다〉」중에서
이 책은 내 생각의 움츠린 여정이다. 내 글의 움츠림은 새삼스럽지 않다. 지금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수많은 제약 때문에 글의 표현과 주장이 우회적이거나 암시적일 때가 많다. 타이핑으로 손이 분주할 때도 머리 뒤편에는 외교적 중립성이란 단어가 감시카메라처럼 내려다보고 있다. 일종의 자기검열이다. 따지거나 비판해야 할 대상에 선뜻 칼날을 세울 수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덕분에 보다 엄격하고 치열하게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논란과 오해를 피하면서 비판적으로 글을 쓴다는 것, 앞으로도 피할 수 없는 나만의 싸움이다. 승산은 없지만 지레 물러서지 않으려고 한다.
---「305쪽, 나가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