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거봉은 등굣길에 편의점에서 평소에 사던 빵과 바나나 우유 말고도 딸기 우유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수정의 책상 위에 딸기 우유를 기세 좋게 내려놓자, 창가를 물끄러미 보던 수정이 거봉을 힐끗 올려보았다.
우유를 내려놓을 때의 패기는 어디로 사라지고, 막상 수정이 쳐다보자 거봉은 다소곳하게 말했다.
“먹을래?”
수정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지금 시비 거는 거냐?’였다.
“뭐, 그냥…….”
거봉은 막상 할 말이 없었다. ‘나도 진짜 이러고 싶지 않은데, 네가 유난히 신경이 쓰여서 그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거봉이 한 말은, “하하하, 오다가 주웠어.”였다. 수정의 눈이 거봉의 다른 손에 들린 바나나 우유로 향했다.
“이, 이건 내가 산 거고…….”
수정의 맑은 눈이 책상 위의 딸기 우유로 향했다.
“이건 주운 거고…….”
거봉은 자신의 의도와는 다른 오해가 쌓이는 것 같은 불길한 느낌에 휩싸였다.
--- p.13~14
야구 모자가 다짜고짜 수정의 다리를 발로 걷어찼다. 퍽! 수정이 잠시 중심을 잃고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거봉은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어서 막지 않으면 큰 사달이 벌어질 것이다. 거봉이 주먹을 쥐고 앞으로 달려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수정의 몸이 떠오르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야구 모자의 얼굴에 발이 꽂혔다. 야구 모자가 억, 소리를 내며 뒤로 휘청거림과 동시에 거봉의 눈이 번쩍 떠졌다. 방금 발차기는 결코 우연히 맞아 들어간 발놀림이 아니었다. 목표물을 정하고, 정확하게 타격한, 고도로 훈련된 솜씨였다.
--- p.21~22
거봉과 수정이 소파에 앉으려고 하자 오남이 벌컥 성을 냈다.
“어허, 누가 앉으라고 허락했냐?”
거봉은 앉으려다 말고 엉거주춤 일어섰다. 수정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여태까지 애쓴 거봉을 생각해서 밀려드는 적대감을 간신히 눌렀다. 오남이 수정을 쳐다보지도 않고, 신문을 다시 촤락 펼쳤다.
“난 싹수없는 놈은 제자로 안 받는다.”
“사부님, 수정이는 그런 애가 아니고요. 그때는 얘가 너무 낯을 가려서…….”
“낯을 가려? 어른이 묻는데 대답도 안 하고 나가는 게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야? 탈북자라더니, 북한에서 네 스승은 태권도 기본 정신인 예의도 안 가르치디?”
가만히 듣고 있던 수정이 발끈했다.
“그때 도와주신 건 감사하지만, 내 스승까지 욕할 건 뭡니까?”
수정의 목소리가 커졌다.
“아니, 두 분 이러지 마시고…….”
거봉이 중간에서 어떻게든 분위기를 바꿔 보려고 애를 썼지만,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이었다.
“네가 행동을 잘못하면 그게 다 스승 욕 먹이고, 부모 욕 먹이는 거지. 여태 그것도 몰라?”
오남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내 스승은 욕하지 마시오, 동지!”
“뭐? 어린것이 버릇없이, 어른한테 동지? 도옹지?”
--- p.59~60
“졌어. 그냥 인정해라. 기회는 다음에도 있다.”
오남이 말했다. 수정은 목을 빳빳이 치켜세우며 다가와 오남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지금껏 보고 계셨잖아요. 제가 진짜 진 겁니까?”
오남은 억울하고, 원통한 수정의 심정을 백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치미는 감정을 애써 꾹꾹 눌렀다. 오남은 수정의 눈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졌어!”
수정이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빛을 잃고 흐려졌다. 그래도 오남만은 진실을 얘기해 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수정이 착각한 것이었다. 아빠가 틀렸다. 남한도 북한도 결국 똑같았다. 공정하게 실력을 겨룰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
--- p.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