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 대 끝자락이던 때, 혜자 님과 산으로 들로 긴 여행을 다녔습니다. 영화 「마더」 촬영지가 전국에 흩어져 있었던 덕분이었는데, 그만큼 저나 촬영감독, 프로듀서 모두 아름다운 로케이션 찾기에 한껏 욕심을 낸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완성된 영화를 보았을 때, 모두가 단번에 깨닫고 말았습니다. 이 영화 최고의 풍광은 무엇보다도 혜자 님의 얼굴 그 자체라는 것을. 그리고 카메라는 점점 더 혜자 님의 커다란 두 눈을 향해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그 신비로운 두 눈을 통해 그분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라는 식의 상투적인 표현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해 가을과 겨울, 그분의 두 눈이 어떻게 시네마스코프의 드넓은 캔버스를 집어삼켜 버리는지 카메라를 통해 생생히 지켜보았습니다. 경이로웠습니다.
수십 년간 수많은 사람이 칭송해 온 혜자 님의 명연기에 대해 제가 굳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겠지요. 다만, 그 놀라운 섬광 같은 순간들이 필름에 담겨지기도 전에, 이 세상 누구보다 가장 먼저 맨눈으로 목격했다는 것은 저에게 분명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저는 또 한 번의 행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혜자 님의 눈빛에 어울리는 맑고 깊은 이야기를 써낼 수 있기를 꿈꾸면서 말입니다.
- 봉준호 (영화감독)
김혜자라는 이름을 생각하면 어떤 샘이 떠오른다. 마야 유적지에 갔을 때 가이드가 근처에 유명한 우물이 있는데 가 보겠냐고 했다. 처녀의 샘, 혹은 황금의 샘이라 불린다는 얼핏 보기엔 그저 평범한 연못 같았다. 자세히 보니 물빛이 오묘했다. 그 물빛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검푸르고 무언가 귀중한 것이나 깊은 슬픔이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을 듯한 그 물빛에서 그녀를 떠올렸다…… 김혜자.
눈이 예쁜 여배우는 많지만 김혜자만큼 아름다운 눈은 드물다. 예뻐서 아름다운 것만이 아니라 그 눈에는 인간에 대한 짙은 애정, 연민, 배려가 가득 담겨 있다. 40년 전, 「전원일기」를 쓰게 된 신인 작가라고 연출가가 소개한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던 김혜자의 눈빛이 잊히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젊은 사람이 쓰기 힘든 드라마인데, 하며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염려와 함께 사람에 대한 대접이 담겨 있었다. 이름 없는 작가라고 무시하는 대신, “꼭 잘 써 줘요.” 하는 격려와 응원이 담긴 따뜻한 눈빛. 그 응원에 힘입어 열심히 쓸 수 있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김혜자의 다소 심술궂은 광팬이다. 나는 그녀가 맡은 역에 일부러 대사나 지문을 장황하게 쓰지 않았다. 그녀가, 그녀의 눈이 대본을 보고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게 보고 싶어서였다.
「겨울 안개」라는 드라마도 함께했었다. 그때도 「전원일기」를 쓰고 있을 때여서 새 작품 쓰는 것이 무리라며 사양했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김혜자’라는 말을 듣고 밤을 새며 대본을 썼다. ‘그 깊고 짙은 눈으로 슬픔을 얘기해 본다?’ 「겨울 안개」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시청률이 어떻고 신드롬이 어떻고 하는 것 때문이 아니라 내가 보고 싶어 했던 김혜자의 눈을 통해 세상의 아픔과 아름다움을 실컷 볼 수 있었기에. 대본 쓰는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배우가 김혜자이다. 나는 그녀와 한 약속이 있다. “저하고 한 약속, 잊지 마세요. 마지막 작품은 제가 쓴다고 했었죠?” 그녀의 깊은 우물 속에 두레박을 던져서 푸른 바닷물을, 영롱한 진주를 한가득 건져 올리고 싶다. 그녀의 우물은 아래로 아래로 깊은 지층을 따라 흐르다가 마침내 드넓은 바다와 만나는 그런 신비한 샘이기 때문이다.
- 김정수 (「전원일기」 「엄마의 바다」 작가)
배우 김혜자에게서 저는 구도자의 모습을 봅니다. 연기라는 화두를 잡고 일생을 살아오신 분. 애초에 삶이라는 것이 드라마임을 알아차린 것인지……. 작품마다 그 배역이 되기 위한 열정과 노력은 구도자의 수행, 그것이었습니다. 연기를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그리고 모든 아픔 뒤에 항상 기다리고 있는 희망을 표현하고 싶어 한 진정 아름다운 수행자입니다. 그녀가 세상을 보는 시선은 누구보다 솔직합니다. 꾸밈이 없어 때로는 가차 없기까지 한 솔직함이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연기로써 세상을 알아 버린 큰 배우. 세상 속 여러 인물을 훌륭하게 살아 낸 배우.
미국 소설가 이디스 워튼이 말한, 빛을 퍼뜨릴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촛불이 되거나 또는 그것을 비추는 거울이 되는 것. 저는 그녀의 인생이 촛불이고 동시에 그녀의 연기가 거울이었다 생각합니다. 모든 이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마치 스며드는 빛처럼, 비교 불가한 김혜자만의 매력과 힘. 함께 작업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고, 앞으로 또 같이할 생각에 가슴이 설렙니다.
- 김석윤 (「청담동 살아요」「눈이 부시게」 연출가)
김혜자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 80년대 중반이었으니 40년이 가까워 옵니다. 존경하는 패션 디자이너 이신우 선생님과 김혜자 선생님이 대학 동창인 인연 덕분이었습니다. 너무 예쁘셔서 사진도 찍어 드리고 포트레이트 작업도 했습니다. 그분을 찍는 것 자체가 기쁨이었습니다. 사실 알 듯 모를 듯한 분이지만 제게는 가끔 속마음을 털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은 김혜자 선생님을 보고 우아한 왕비 같다고 하지만, 그렇게 소탈한 왕비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프리카에 동행했을 때였습니다. 내전 중인 수단의 국경 지대에서 봉사 활동을 했는데, 어느 천막 안에 들어가니 테이블 위에 커피와 설탕이 놓여 있었습니다. 설탕통을 여니 개미가 가득했습니다. 여자 스태프들뿐 아니라 남자들까지 기겁하고 물러서는데, 김혜자 선생님은 ‘이게 얼마나 귀한 건데…….’ 하시며 손가락으로 개미를 다 훑어 내고는 커피에 설탕을 타서 아무렇지도 않게 마셨습니다.
현지 환경이 열악하다 보니 아이들 위생 상태가 좋을 리 없는데, 선생님은 항상 자기 자식처럼 안고 부비고 입 맞추고 하셨습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아프리카에서도 옷을 단정하게 입고 다니시던 모습입니다. 한번은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그래야 본인도 기분이 좋고 그걸 보는 스태프들도 기분 좋게 일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수많은 연기를 통해 완벽히 검증된 분이지만, 언제까지나 그 매혹적인 눈빛과 본성을 가까이하고 싶은 바람입니다.
- 조세현 (사진작가)
어느 아침,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평범하지만 특별한 사진 한 장. 선생님 댁 테라스 풍경이었습니다. 작은 새들이 열심히 무언가를 쪼고 있는 평화로운 사진. 매일 아침 찾아오는 새들에게 쌀을 뿌려 주고 물을 나눠 주며 하루를 시작하시는 선생님. 시선이 닿는 것마다 사랑과 진심이 그렇게 늘 함께합니다. 선생님은 연기와 인생의 선배님이시기도 하지만 꽃과 하늘, 풍경 그리고 강아지 사진을 나누는 친구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소소하지만 사랑스러운 대상을 마주할 때 선생님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그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감사하게 바라보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화 끝에 선생님께서 늘 덧붙이는 인사가 있습니다. “감사뿐이야!” 작은 것 하나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마음가짐 속에 선생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그 마음이 티 없이 맑아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오를 때가 많습니다. 덕분에 선생님의 존재 자체로 세상이 한결 따뜻해지는 순간들을 경험하곤 합니다. 그런 선생님의 젊은 시절을 연기할 귀한 기회가 있었습니다. 잠시나마 ‘김혜자’로 살 수 있었던 덕분에 영광스럽게도 선생님께서는 저를 ‘나의 청춘’이라 불러 주십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혜자의 바람처럼 선생님과 함께 오로라를 보는 것이 실제 저의 버킷리스트가 되었습니다. ‘사랑만이 희망입니다. With Love.’ 선생님이 보내시는 메시지처럼 늘 삶의 한가운데 사랑이 숨 쉬는 선생님의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저의 인생에 있어 선생님을 만난 것은 선물입니다.
- 한지민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