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신약 서신서를 한 책에서 묶어서 다루는 것이 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서신서들은 같은 저자가 쓴 것도 아니고 같은 독자들에게 보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서신서를 나란히 놓고 읽어 보면 그 이유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두 서신서에는 수많은 개념들과 단어들이 공통으로 나오며, 베드로후서에는 유다서 전체처럼 보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두 서신서는 자연스럽게 한 쌍을 이룬다. 하지만 두 서신서가 비슷하다고 해서 속아서는 안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별개이며 독립적인 두 통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이 강해서에서는 두 서신서의 서로 다른 윤곽과 관심사들을 구분해 보려 애썼다.
---「저자 서문」중에서
베드로후서의 목적은 두 가지다. 그와 같은 거짓 인도자들의 정체를 밝히는 것과, 더욱 중요하게는, 교리적이고 도덕적인 왜곡들이 파죽지세처럼 그들의 교제권에 침투해 들어올 때 교회 앞에 생존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3:17에서 베드로가 “사랑하는 자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은 그들이 “굳센 데서” ‘떨어지지’ 않도록 오류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서론」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집요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이교 사회 속에서 불안해하며 유혹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굳게 결심할 수 있도록 하기에 충분한가? 베드로의 대답은, 예수님의 능력은 그렇게 하기에 적절하고도 넘친다는 것이다.…사람들은 베드로의 유대인 목수 친구, 자신의 꿈 때문에 연약한 모습으로 십자가로 간 그 친구를 뒤돌아본다. 하지만 베드로는 또한 앞을 내다보고, 예수님이 왕이며 재판관으로서 위대하게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린다.
---「2장 능력과 약속들」중에서
2천 년 전에 그가 말한 그 본보기는 여전히 두려울 정도로 적절하다. 오늘날에도 삶을 좀 더 유쾌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복음을 좀 더 매력적으로 만들기 위해, 불편한 기독교 교리를 너무나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2:2). 그것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계시되고 확정된 도덕들에 따라 궁극적으로 개인이 심판을 받는다는 생각을 폐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경우 그리스도는 더 이상 그분의 세계를 다스리시지 않는다. 우리가 다스린다. 그분은 더 이상 그분의 교회를 다스리시지 않는다. 우리가 다스린다. 그분은 더 이상 심지어 우리의 삶도 다스리시지 않는다. 거기서도 역시 우리가 다스린다.
---「8장 죽음에 이르는 사역자에 대한 단평」중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그랬듯이 여전히 죽는다. 하지만 구약도 신약도, 완전히 새로운 창조가 있기까지는 그 사실이 변하리라고 약속하지 않았다. 계절들이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 원자보다 작은 미립자로부터 태양계 우주 공간에 이르기까지 우주가 균형을 이루고 있고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은 모두 오래 참으시는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증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분이 세상에 개입하지 못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거짓 선생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안정된 세상이 있을 것을 보장하는 바로 그 말씀이, 또한 그들이 조롱하는 심판이 온다는 것을 보장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11장 하나님의 능력 있는 말씀」중에서
유다서는 최근까지도 현대 학자들에게, 혹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은 책이다. 이에 반해, 초기 시대에는 대중에게 인기를 끌었다. 성경학자이며 많은 글을 쓴 저자인 오리게네스는 유다서가 “하늘의 은혜에서 흘러나오는 말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 살아 있는 교회가 모든 성경에 대한 확신을 되찾을 때, 그리고 우리가 유다가 직면했던 것과 동일한 대적들과 직면하여 교회 안에서 모든 도덕적 제한을 버리도록 만드는 가짜 예언 계시와 다시 씨름할 때, 시련을 겪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 유다의 지혜로운 경고들과 확신 있는 믿음을 다시 한번 대단히 귀중히 여기게 될 것이다.
---「유다서 서론」중에서
유다는 그가 자기 독자들에게 말할 기본적 성경 이야기들을 그들이 “본래…알고 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으로 보아 그들은 그 이야기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아마 우리처럼 그들은 구약의 기사들을 어린아이들을 위한 좋은 이야기들로, 일단 어른이 되고 나면 아무런 메시지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유다는 그 상황을 개선하기 원한다. 여기서 그의 말은 ‘변증’이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대단히 필요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파악하지 못하는 진리들을 우리 앞에 확고하게 놓아둘 필요가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3장 심판에 대한 경고: 구약의 세 가지 예」중에서
유다는 우리의 삶 전체 즉 우리의 지성, 행동, 양심, 동기, 상상력를 점점 더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시키기 원한다. 이것은 평생에 걸친 활동이다. 그는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계속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또한 함께 하는 활동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자신을 세우[라]”(build yourselves up)고 말하는데, 그 말은 복수로 되어 있으며 우리가 혼자서 영적인 추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 관심사와 사랑에 관여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리스도인이 변절을 할 위험이 있음을 보여 주는 첫 번째 표시는 격려와 양육의 원천에서 떨어져 나가 홀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다.
---「8장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움: 그리스도인」중에서
유다서를 마무리하는 말은 아마도 가장 잘 알려진 말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장엄한 송영”을 말하고 노래하면서, 자신의 교회에 대한 유다의 관심사를 따라 우리가 여행해 온 길을 여행하지 않고 그것을 노래한다. 그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러운 노래로서 의미가 통한다. 하지만 유다의 논증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그것은 좀 더 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유다는 자신의 서신서를 기도로 시작했던 것처럼 기도로 마무리한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같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10장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움: 우리가 일반으로 받은 구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