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더 깊이 알아가고자 하는 크리스천들을 위해 여기에 작은 상차림을 내놓습니다. 기꺼이 사도 바울이 소개한 복음 레스토랑의 주방 요리사가 되길 자처한 나는 바울 사도가 공급한 싱싱한 재료로 복음의 성찬을 맛깔스럽게 만들어보았습니다. 상차림을 하면서 유념했던 한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독자들이 복음에 담긴 놀라운 진실과 하나님의 구원 능력에 활짝 눈을 뜨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언제나, 어디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그분이 완성하신 복음의 품에 안겨 샬롬을 경험하길 바랐습니다.
---「저자 서문 (본문 6쪽)」중에서
이런 의미에서 “로마서의 논리는 교리 논리보다는 역사 논리에 가깝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2 즉, 하나님의 구원 경륜 안에서 유대인의 위치가 무엇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그리고 이방인 역시 하나님의 구원 역사 안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해야 하는지에 관한 광대한 진술을 담고 있는 책이 로마서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로마서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한 아버지와 두 아들”(일명 “기다리는 아버지 비유”)에 관한 이야기를 구원사적 논리로 써 내려간 장문의 편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큰아들 유대인과 작은아들 이방인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9-11장이 특별히 더 그러합니다). … 그렇다면 ‘하나님의 의’는 무엇입니까? 신약 헬라어 ‘디카이오쉬네’는 종종 ‘의’, ‘의로움’으로 번역되지만, 더 정확하게는 ‘정의’로 번역되는 구약 히브리어 ‘쩨다카’와 상응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정의’로 번역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구원 역사에서 하나님의 정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사람에게 전가되는지는 이차적 주제입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정의 전가(칭의)로만 로마서를 읽으려 하는 좁은 시야를 면치 못합니다.
---「로마서 새로 읽기 2 (본문 15, 17쪽)」중에서
우리 세대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한때는 550억 달러의 국가 부채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정치가들의 무책임한 경영으로 국가 부채가 늘어나기도 했지만, 과소비와 허세에 우리 경제가 녹아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경제학에서 ‘국가 부채’라고 부르는 것을 신학에서는 ‘원죄’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즉, 원죄란 앞 세대에서 우리 세대로 전가되어 온 엄청난 양의 부채, 다시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원죄란 우리에게 찾아온 부모들의 부채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매우 공평하지 못한 일처럼 들립니다. 자, 이것이 바울의 논점에 해당한다면 우리는 온갖 불평을 늘어놓을 수 있습니다. “원죄란 아담과 하와가 저질러놓은 잘못이지 우리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중요한 구절을 추가합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빚을 모든 사람이 계속 불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이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러한 식으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07. 우리는 아무도 낙원에 태어나지 않았다 (본문 117-118쪽)」중에서
우리 옛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줄을 알면서도, 그 죽음을 스스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집행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데도 죽지 않습니다. 프레더릭 비크너가 한 말대로, “첫 아담(사람)은 탁월한 수영 선수mighty swimmer”입니다. 첫 사람 아담에 속한 사람은 아무리 하나님이 물에 빠뜨려도 수영을 너무 잘해 익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아담(사람)이신 그리스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죽음의 잔을 먹이셨을 때 기꺼이 죽음에 빠져 익사하셨습니다. 전혀 수영을 못하는 것처럼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는 맥주병이었습니다. 우리가 죽을 수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을 뿐입니다. 혼자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집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면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과 함께해야만 죽음의 물속에서 산자의 땅으로 올라올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흐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죽음의 잔해들 안으로 흘러들어오는 조수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는 깨어질 수도 있고 흐트러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서적으로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부스러지고 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은혜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09. 맥주병 예수 (본문 137-138쪽)」중에서
그러나 믿음과 신념과 신앙에 대한 진지함과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지구는 평평하다고 아무리 진지하게 믿는다고 해도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돼지가 날 수 있다고 아무리 진지하게 믿더라도 돼지는 잠시도 날 수 없습니다. 단순히 진지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지 말고 열어놓고 믿어야 합니다! 달리 말해 우리 신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압니까?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각자 소견에 맞는 게 곧 진리라고 말합니다. 포스트모던주의는 세상에 ‘절대적 진리’는 없고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라고 강조합니다. 소위 ‘진리의 상대성’이 특징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어느 정도까지 진리를 알 수 있다고 확신합니까? 자신이 고심해서 내린 결정에도 혼란스러워하는 게 우리인데, 그런 우리보고 자기 마음을 믿으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우리 마음은 언제나 서로 경쟁적인 애정들로 갈라지고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과 저것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이 서로 경쟁합니다. 그러니 나도 내 마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만물보다 더 부패한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오래전에 예언자 예레미야가 말했지요. 내 마음 안에서는 대부분 아주 좋지 못한 위원회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마음속에 특별한 관심이나 끌림이 나타나 정상적인 위원회를 멈추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갑니다
---「12. 일상의 승리가 일생의 승리로 (본문 168-169쪽)」중에서
우리가 기도할 줄 모르는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똑바로 기도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궁핍이 얼마나 깊은지에 무지할 뿐 아니라, 자기 영혼의 깊이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의 깊이를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 그것을 아시고 찾아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당신의 측량줄로 우리 마음과 영혼의 깊이를 재십니다.
우리는 자기 영혼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습니다. 예를 들어, 기껏해야 영혼은 마치 빙산의 일각과 같다는 것 정도를 압니다. 물 위로 솟아난 빙산의 극히 일부분만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 해당하는 영혼의 ‘의식 세계’만을 알 뿐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부분, 즉 의식의 문지방 아래는 볼 수 없습니다. 영혼의 잠재의식 부분이 얼마나 거친 세계라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 세계는 격정과 열망, 본능과 충동들로 가득 찬 거친 세계로, 우리가 의식하는 삶, 즉 우리가 행동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일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정도만 압니다. 영혼의 깊은 세계는 마치 용암이 들끓는 태고의 세계와도 같습니다. 원초적 열망들과 격정적인 본능, 욕망들이 끓어오르고 분출하는 세계입니다. 이런 것은 실제로 우리의 의식 세계나, 우리가 선택하고 결정하고 사는 방식,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일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 또한 우리는 잘 압니다.
---「16. 목발 짚은 기도 (본문 215-216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