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며칠간의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나는 차츰 고요한 고향의 삶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다. 저 바깥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 속에 섞여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일과 꿈 사이로, 학업과 만취한 밤 사이로, 때로는 빵과 우유로, 때로는 책과 담배로 살면서, 매달 다른 사람이 되어 떠돌았던가! 그런데 여기는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변한 게 없었다. 매일 매주가 밝고 고요한 똑같은 박자 속에 흘러갔다. 나는 마치 한 번도 이곳을 떠난 적이 없었던 사람처럼 금세 이곳 생활에 적응했다.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밤은 공동생활이라는 익숙한 느낌으로부터 우리를 멀리 떼어놓는다. 더 이상 불빛 하나 비치지 않고 사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으면, 아직 깨어 있는 사람은 고독을 느끼며 혼자 떨어져 나와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불가피하게 혼자가 되어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그래서 고통과 두려움과 죽음을 오로지 혼자 맛보고 견뎌내야만 한다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그 인간적인 감정이 생각의 갈피마다 조용히 끼어들어, 건강하고 젊은 사람에게는 그림자이자 경고로, 약한 사람에게는 공포로 다가온다.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그즈음 내게 가장 중요해 보였던 일이란 헬레네 쿠르츠, 그리고 그녀에 대한 나의 예찬이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몇 시간은 내 마음을 움직이다가도 다시 몇 시간은 가라앉았다. 늘 꾸준한 것이라고는 편안하게 숨 쉬고 있는 생에 대한 나의 감정, 조급함도 목표도 없이 매끄러운 물 위를 힘들이지 않고 태평하게 헤엄쳐 가고 있다는 그 느낌뿐이었다. 숲에서는 어치가 울고 블루베리가 익어갔다. 정원에서는 장미와 불꽃처럼 붉은 한련이 피었다. 나는 그 일부가 되어 세상의 다채로움을 알게 되었고, 나도 언젠가 제대로 된 남자가 되어 성숙하고 현명해지면 그때는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하고 궁금해졌다.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헬레네와 안나를 한자리에서 보며 동시에 두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은 오묘했다.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헬레네와는 피상적인 것들에 대해서만 대화할 수 있었고, 그것도 최대한 고상한 태도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에 반해 안나와는 온갖 재미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흥분하거나 긴장하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었다. 그런 그녀가 고마웠고 또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는 몸도 편안하고 마음도 놓였지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아름다운 헬레네를 끊임없이 힐끔거렸다.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러한 변함없는 우정 관계가 가끔씩 조금 괴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확실하게 울타리가 쳐져 있는 우정이라는 정원에서 벗어나 사랑이라는 그 넓고 자유로운 땅으로 나아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티 나지 않게 이 순수한 여자친구를 그 길로 유혹할 수 있을지 전혀 감이 안 왔다.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나는 차창에 기대서 가로등과 불 켜진 창문들이 반짝이는 도시를 내다보았다. 우리 집 정원 근처에서 피처럼 붉은 강한 빛이 보였다. 동생 프리츠가 서 있었다. 양손에 벵골폭죽을 들고. 그리고 내가 그 옆을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순간 프리츠는 로켓 폭죽을 수직으로 쏘아올렸다. 나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지켜보았다. 솟아오른 폭죽이 공중에 한참 머물다가 부드러운 활 모양을 그리며 붉은 불꽃비로 사라지는 그 모습을.
---「청춘은 아름다워」중에서
1890년대 중반에 나는 고향의 작은 공장에서 급료 없이 수습공으로 일하다가, 그해에 고향을 완전히 떠났다. 늦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갈 무렵의 일이었다. 열여덟 살이었던 나는 하루하루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정작 내 청춘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지난 일이 가물가물한 나이 많은 사람들은, 그해에 우리 고향 지역에 큰 폭풍이 불어닥쳤고 그 폭풍은 온 나라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재해였다는 것만 기억하면 된다.
---「회오리바람」중에서
그때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철도의 레일 저쪽 끝에서 기차 한 대가 달려오더니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쳐 갔다. 그 순간 ‘이제 여기서는 어렸을 때 느꼈던 즐거움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기차를 타고 미지의 세상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회오리바람」중에서
기분이 좋지 않아 나는 풀밭에서 일어났다. 아, 정말 불쾌한 기분이었다. 내일 당장 하던 일을 그만두고, 어디로든 멀리 여행을 떠나 버리고 싶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라도 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나는 산꼭대기에 오르기로 마음먹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회오리바람」중에서
더는 앞으로 갈 수 없었다. 마구 쓰러져 있는 나무와 나뭇조각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광장과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성스러운 그늘과 커다란 나무가 있었던 이곳은 이제 텅 빈 하늘 아래 폐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마치 나 자신의 뿌리가 뽑혀서 백일하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었다. 온종일 근처를 돌아다녀 보았으나 친숙한 숲길도, 어렸을 적에 기어오르던 호두나무나 참나무도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회오리바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