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 치열하게 경쟁하였고, 그 결과 수많은 사상자와 전쟁 포로들이 생겨났다. 7세기 전쟁 포로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고구려는 2회에 걸쳐 포로 11,000명을 획득하고, 4회에 걸쳐 7,000여 명을 상실했다. 백제는 2회에 걸쳐 1,300여 명을 획득하고, 6회에 걸쳐 13,730명을 상실했다. 신라는 9회에 걸쳐 16,730여 명을 획득하고, 3회에 걸쳐 9,300명을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고구려는 4,000여 명 이득을 보았고, 백제는 12,430여 명 손해를 보았으며, 신라는 7,430명 이득을 보았다.
--- p.11~12
고조선은 한국에서 최초의 국가라는 점에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왔다. 고조선의 국가형성 경험은 이후 부여·고구려·신라가 고대국가로 성장·발전하는 과정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조선은 처음부터 거대한 영역을 다스리는 국가는 아니었다. 고조선은 작은 지역집단으로 시작하여 소국으로, 다시 주변 소국들과 연맹체를 형성하고 나아가 진번·임둔을 복속시키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또한 고조선은 중원제국·동호·흉노 등 주변 이민족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성장하였다. 이처럼 대내적으로 예맥세력을 규합하여 국가의 규모를 확장시키고 대외적으로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외교와 전쟁이 수반될 수밖에 없었다.
--- p.18
하지만 고고학적 연구 결과는 문헌과 다소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 초기 도읍으로 인정되는 환인 오녀산성에서 확인된 1호 대형건물지와 이를 포함한 제3기 문화층은 내부에서 출토된 서한 시기 오수전(五銖錢)과 대천오십전(大泉五十錢), 반량전(半兩錢), 왕망 시기의 화천(貨泉) 등으로 인해 대체로 ‘양한(兩漢: 서한과 동한) 시기’와 비슷한 고구려 초기로 비정되고 있다. 하지만 오녀산성의 성벽은 그보다 늦은 제4기에 축조된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는 4세기 말~5세기 초보다 이른 시점(王志?, 2016, 63~64쪽) 또는 고구려 중기에서도 약간 이른 시점에 해당한다. 오녀산성에서 초기 형태의 옹성 구조나 정연하지 못한 쐐기형 성돌을 이용한 겉쌓기 방식 등이 보이기 때문이다(양시은, 2020, 142쪽)
--- p.34
궁은 활이고, 시는 화살이며, 도는 칼이고, 모는 창의 일종이며, 개갑은 갑옷이다. 모두 고대의 기본적인 무기였다. 고대의 무기는 다양한 방식으로 분류된다. 공격용 무기와 방어용 무기로 나눌 수 있고, 공격용 무기는 근력의 이용 형태에 따라 원거리 무기와 단거리 무기로 나눌 수 있으며, 단거리 무기는 다시 길이에 따라 단병기((短兵器)와 장병기(長兵器)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여러 방식의 분류를 참조해 [위략]에 보이는 고구려의 무기를 구분해 보면, 공격용 무기(궁·시·도·모)와 방어용 무기(도·모), 원거리 무기(궁·시)와 단거리 무기(도·모), 단병기(도)와 장병기(모)로 분류할 수 있다
--- p.51
고구려는 4세기 중국 군현 병합 이후 지속적으로 한반도 중부이남 지역에 대한 진출을 모색하였다. 광개토왕은 영락 6년에 백제를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하여 5세기대에 성공적으로 한강유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고구려는 대상과 시기, 대응에 따라 선택적으로 남진로를 활용한 것으로 파악된다. 고구려의 남진로를 구체적으로 구획하기 위해서는 고구려의 남진과 관련된 문헌자료와 고고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문헌자료가 부족한 고대사 분야에서는 고고자료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최근 활발한 고고학 발굴조사의 결과로 고구려 관련 유적이 다수 확인되었으며, 이에 대한 조사와 함께 연구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 p.69~70
위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수 육군은 ‘24군+천자 6군’ 등 모두 30개 군으로 편성된 것으로 나온다. 수군에는 육군 이외에도 ‘창해도군(滄海道軍)’으로 불리는 수군(水軍)이 있었는데, 원정에 동원한 육군과 수군(水軍)의 총병력이 “1,133,800명이었고, 200만이라고도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고 한다(『수서』 권4 제기4 大業 8년 춘정월). 한편 수 육군의 병종 구성에 대해서 『수서』 예의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기병과 보병 그리고 치중융거산병(輜重戎車散兵)이 있었다고 한다(『수서』 권8 예의3 大業 7년). 기록에 따라 육군 각 군의 양상을 살펴보면 기병은 4단(團)이 있었고, 1단은 10대(隊)로 구성되어 있으며, 1대마다 100기(騎)가 있었다. 그렇다면 각 군에는 4,000기의 기병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 p.77~78
백암성 전투 이후 당군은 안시성 인근에서 고구려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주필산 전투이다. 현재 주필산 전투에 대한 연구는 고구려-당 전쟁사 연구에서 가장 많이 진척이 되었으며, 그만큼 논의도 병종, 병력규모, 전략전술, 전투양상 등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주필산 전투에 직접 참전한 당군의 규모는 3만(임용한, 2001·2012; 서영교, 2003·2015a·2015b; 문영철, 2021), 16만 명(노태돈, 2009), 18만(羅棟煜, 2008a), 30만(김용만, 2003; 김성남, 2005), 수십만(백기인, 2011)으로 견해가 나뉘며, 고구려군의 규모는 4만(김성남, 2005; 백기인, 2011), 5~6만 이상(임용한, 2001·2012), 6~7만(문영철, 2021), 5~6만(임기환, 2022), 15만(노태돈, 2009)으로 견해가 나뉜다. 다만, 임기환은 당시 주필산 전투에 동원된 고구려의 총병력이 15만 명이라는 것과 이에 맞선 당군의 규모가 3만 명이라는 것은 중국 측이 당군은 3만 명으로 축소하고 고구려군의 규모는 과장하여 당태종의 승리를 과대 포장한 사례로 보았다.
--- p.93
한편 624년 속함성 함락 이후 백제는 경남 서부지역에서 신라를 파상적으로 침공하면서 일부 지역을 탈취했다. 당시 백제가 확보한 곳은 기록상 서쪽 변경의 2성(627년) 및 서곡성(西谷城)으로 나오는데, 구체적인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624년 속함성 함락 및 642년 대야성 침공과 모두 계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위치는 경남 거창 방면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이처럼 백제 무왕 전기에는 신라와 비교적 간헐적으로 공방전을 주고 받았지만, 624년 속함성 공취 이후에는 소백산맥을 넘어 함양·거창 방면의 가야고지에서 신라의 영역을 잠식해나가기 시작했다.
--- p.132
그러나 여전히 극복해야할 부분도 적지 않다. 지금까지 신라 군사조직 연구는 개별 군사조직에만 집중해왔다. 또한 개별 군사조직의 견해도 다른 군사조직과의 연결없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따라서 신라 군사조직 전체의 모습을 밝히는 작업은 아직 제자리걸음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라 군사조직의 활동 모습이 단편적으로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의 운용실태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어렵다. 한편으로 이들 군사조직을 구성하는 구성원들이 어떻게 충원되었으며, 총원이 몇 명으로 구성되었는지, 어떤 체계 아래에서 작동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물론 신라 군령권 및 군정권의 최고 기관인 병부(兵部)와 연결하여 이해하려는 부분도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 p.190
첫째, ‘서남해방수’ 및 ‘비장’을 경험한 자로 해상세력과의 제휴가 가능하며, 해상세력을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점. 둘째, 일본 측 사료에서 ‘신라해적’의 출몰이 확인되는 893년 이전에 이미 독자적인 정치 세력화에 성공한 점. 셋째, 자립 초기 단계부터 5000명 이상을 규합하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있었던 점. 넷째, 893년 무렵에 이미 일본으로의 접근이 용이한 항구(강주 관할)를 확보하고 있었던 점. 이 네 가지 측면만을 보더라도 앞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신라해적’의 특성, 즉 893~894년 무렵에 이미 수십 소 내지 100소 정도의 선박 및 2000명 이상의 대규모 조직을 운용할 수 있는 해상세력, 게다가 뛰어난 전투능력을 갖추고 있는 무장세력이었다는 점과 잘 맞아떨어지는 듯 보여진다.
--- p.251
전투는 아군이 결정한 장소로 이동해서 싸우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행군을 해야한다. 과도한 체력 소모 없이 능숙하게 행군하고, 행군 중에 규율을 잘 유지하는 것은 군대가 갖춰야 할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앞에서 한 번 소개했던 로마제국의 베게티우스는 그의 책에서 “병사들이 첫 번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군사 걸음(military step)”이라면서 “행군이나 진형에서 대열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말한다.
--- p.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