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운 배』를 읽는 건 작가가 치밀하게 직조하고 치열하게 밀어붙인 이야기에 빠져드는 일인 동시에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비극과 거기에 좌초된 진실을 함께 목도하는 일이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이지만 바닷물에 녹아 다 썩어버린 거대한 배의 이야기를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일은 힘들다. 그러나 『누운 배』가 지금 여기의 우리들이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인 것만은 분명하다.
권력에 묻어가고 싶었던 한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며 썩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 진실에 대해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는 것, 할 수 있는 것이 없지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사람들이 행동하기로 결단하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 되었다. 그것을 포착해낸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 강태식 (소설가)
단단하고, 무겁고, 차갑다.
새로운 시대의 리얼리즘은 비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소설이 세상을, 세상이 소설을 닮은 탓이다.
기업 소설이자 남성 소설이라 칭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기존의 소설들이 얼보았던 현실을 직시한 오늘의 소설이다.
- 김별아 (소설가)
『누운 배』는 흔하게 보는 리얼리즘 계열의 소설이 아니다. 이 소설이 가진 디테일의 정확함과 정교함, 세밀함은 단순히 리얼리즘이라고 부르기에 아까울 정도다. 디테일의 세밀한 묘사는 소설 전체에 걸쳐, 페이지를 더해갈수록 조금씩 중첩되고 축적된다. 그리고 그 축적의 효과가 어느 순간 일정한 수준을 넘어설 때, 거대한 힘이 되어 읽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축적의 효과가 독자를 향한 힘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임계점이 바로 누워 있던 배가 일으켜 세워지는 순간이다. 그 순간에 지금까지 감춰져 있던 일그러진 진실이 드러나면서 소설은 우리 인생이 누운 배와 같다는, 우리 사회가 누운 배와 다름없다는 보편성을 획득하게 된다. 『누운 배』가 그저 리얼리즘이기만 했다면 추천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이 소설이 보여주는 디테일 묘사의 극단적 추구가, 리얼리즘적 양식 그 이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했다.
문학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 곳곳에서 리얼리즘이 다시 돌아오는 현상을 보게 된다. 리얼리즘이 돌아온다. 지난 세기에 우세했던 한 경향이 돌아온다면, 이 시대가 그 경향을 다시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리얼리즘의 회귀가 어디까지, 얼마나 이어질지 궁금하다.
- 백민석 (소설가)
일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마치 돋보기로 보듯 그렇게 세세하게 들여다보면, 평범한 장면도 환상의 세계를 보는 듯하게 느껴진다. 극단적인 세밀함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가 ‘인간’이란 존재를 내려다보는 듯한 효과를 준다. 거대한 배가 쓰러지고, 보험사와 실랑이를 하고, 구조조정을 한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음모가 난무하고,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을 밀어낸다. 이 소설은 이런 과정들을 리얼하게 그려낸다. 너무나 리얼해서 직업의 세계라는 다큐를 보는 듯하다. 그 결과, 독자인 나는 책을 읽다 어느 순간 조선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운동장의 개미를 내려다보듯. 그걸 구경하는 내가 누운 배처럼 쓸모없는 인간이 된 듯해 쓸쓸해진다.
- 윤성희 (소설가)
예심 심사를 하면서 응모작 31편을 읽었는데, 두 번째로 집어 든 원고가 『누운 배』였다. 읽는 내내 놀라고 신기해서 어안이 벙벙했다. 초고화질 카메라를 장착한 드론이 하늘을 날아다니며 하나의 세계와 그 세계 속 인간 군상을 구석구석 촬영해서 보내오는 영상을 보는 듯했다. 그 세계의 풍경도, 현장을 중계하는 렌즈의 각도도 낯설고 새로웠다. 동시에 익숙했다. 왜냐하면 그 드론은 사실 2016년 대한민국의 모습을 축소해서 만든 정교한 미니어처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으므로.
이 드론의 렌즈를 통해 비로소, 지금 한국을 온통 뒤덮은 거대한 부조리의 검은 구름이 어떤 모양으로 생겼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숨을 막는 그 구름은 옆으로 쓰러진 배 모양으로 생겼다.
남은 원고 29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었지만 『누운 배』보다 강렬한 소설은 없었다. 나는 본심에서 『누운 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는데, 다른 심사 위원들이 이 작품을 열렬히 지지하고 나섰다. 이런 멋진 소설을 남들보다 먼저 읽을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한다.
- 장강명 (소설가)
“배가 쓰러지니 어서 회사로 들어오라는 팀장의 전화를 받았다.” 첫 문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배의 침수가 시작되었음을 알린다. 이런 식의 시작으로 이 소설은 자신만의 시점과 개성을 확보한다. 첫째는 사고의 원인이 아니라 그 이후를 보는 시점. 통상 사고가 일어나고 그 원인을 따지는 일은 과거를 해명함으로써 미래의 불행을 방지할 수 있다는 희망을 남긴다. 그러나 사고가 일어나고 그 이후를 서술하는 시점은, 이 소설이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는 대로, 가망 없는 현실의 지속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비관적이다. 그러나, 덕분에 우리는 쓰러진 배가 아니라 쓰러진 이후 거대하게 썩어가는 배의 참담한 몰골을 압도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어쩌면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고 이후 연달아 일어나는 사건들이 소설의 주제를 끌고 나가는 광경. 이는 최근의 한국 소설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소설은 단단하고 건조하게 사건 이후의 일들을 속도감 있게 서술한다. 서술자가 목격한 사실과 사실이 모여 중국에 자리 잡은 중소 규모 조선소의 전체 얼개가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펼쳐진다. 추리나 진단이나 분석이 미처 개입할 여지없이 꽉 들어찬 사실들의 집적은 사실과 현장의 힘을, 상식적 교훈이 아니라 소설의 몸체로 확인하게 한다. ‘누운 배’의 상징이나 조선소의 관료주의와 보신주의는 어쩔 수 없이 지금의 한국 사회를 떠올리게 하지만, 그런 식으로 단순히 환원될 수 없는 무엇이 이 소설에는 있다.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사실로서 그러하다는 것에 대한 무섭도록 간결하고 단호한 감각이 바로 그것이다.
- 서영인 (문학평론가)
무엇이 좋은 소설일까. 소설 본연의 책무는 무엇일까. 우리를 감동시키는 소설은 무엇인가. 『누운 배』는 이런 원초적인 질문에 진솔한 목소리로 화답한다. 시대의 아픔과 함께 호흡하고, 시대에 뒤처진 자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의 앞날을 비추는 등불이 되어준다.
- 정여울 (문학평론가)
진수까지 마친 배가 조선소 부두에서 쓰러진다. 전체 길이 200미터, 높이 34미터에 폭 32미터의 거대한 선체다. 이것은 어쨌든 일어난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이 ‘누운 배’라는 ‘사실’이 될 수 있을까. 조선소 안팎에서 작동하는 다기한 이해의 얽힘, 언제든 보이는 것만 보게 우리를 주저앉히는 상투와 허위의 장막은 ‘누운 배’의 사실을 흐리고 지운다. 『누운 배』의 작가가 한 일은 누구나 쉽게 주저앉는 그 자리를 거슬러 ‘누운 배’를 ‘누운 배’로 성립시키는 사실의 언어가 작동하는 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낱낱의 사물과 사태를 포함하는 시간의 누적적 수집과 보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점이다. 나는 『누운 배』가 도달하려고 애쓴 이 사실의 자리에서 인간 진실에 대한 끈질긴 열정과 상상을 읽었고 감동했다.
- 정홍수 (문학평론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성수대교가 내려앉고 세월호가 침몰하였다. 이들 사건에도 그 형이상학이 있고 무의식이 있다. 『누운 배』는 재난 소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업 소설이지만 붕괴의 사회구조를 말한다는 점에서 온갖 재난사고의 형이상학이며, 그 인간관계의 세부를 말한다는 점에서는 그 무의식이다. 『누운 배』는 몸집이 크면서도 섬세하다.
- 황현산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