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로마서는 바울의 선교 의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바울서신과 더불어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모습과 일치한다. 현재의 튀르키예와 그리스에서 선교 활동의 한 국면을 끝마친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가난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헌금을 전달하고 그 뒤에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로마로, 또 거기서 스페인으로 향할 계획을 세웠다. 바울의 계획은 두 가지 대비책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먼저, 바울의 ‘문학적 특사’인 로마서는 수도 로마에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바울 자신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것이다(1:10; 15:23-24). 둘째, 예루살렘에 헌금을 전달하는 민감한 임무를 의식한 바울은 성도(聖都) 예루살렘을 방문할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로마 교인들에게 요청했다(15:30-32). 이 두 가지 대비책은 그들을 바울의 사역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서론」중에서
바울이 주기 원하는 “신령한 은사”와 그가 거두어들이기 원하는 “열매”가 로마 교회에 필요한 이방인과 유대인의 화해를 가리키는 절묘한 언급이라는 점도 간과되지 않아야 한다. ‘서론’에서 보았듯이, 클라우디우스 칙령이 폐기된 후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 수도 로마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그동안 로마 교회가 점차 이방인 중심으로 변한 것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로마의 상황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척하지 않으면서, 또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성취할 수 있는 척하지 않으면서, 바울은 이 두 표현을 선택해 자신의 복음 해설을 통해 그들에게 화해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점을 알리려고 했을 것이다.
---「2. 인간 바울과 그의 메시지(1:8-15)」중에서
하박국 2:4에서 가져온 결론적 인용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보다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된 사람은 살 것이다”로 번역되는 편이 더 낫다. 핵심 개념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먼저 자신과 올바른 관계를 맺은 사람에게 생명을 선사하신다는 것이다. 행위가 아닌 믿음─하나님에 대한 신뢰, 하나님께 대한 헌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정의된 믿음─이 하나님의 법이 선사하는 단 하나의 합당한 성취다. 이것이 로마서의 알맹이다. 하박국서 인용문에 나오는 의-믿음-생명 패턴은 실제로 바울이 로마서에서 전개하는 전반적인 주제와 일치한다.
---「3. 복음: 구원의 능력(1:16-17)」중에서
“죄 아래”는 바울의 핵심 모티프다. 물론 사도는 개별적 위반에 대해 개인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믿었지만, 개별적 위반은 악이 인류에게 행사하는 내면적 장악력의 증상에 불과했다. 바울은 (개별적 행위를 가리키는) 죄들(sins)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단일한 본성인 죄(sin)를 언급한다. 바울은 죄를 의인화하는 경향이 있다. 죄는 인간(6:16)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8:21)를 노예화하는 외적 세력이다. 죄는 인간의 악의 합성물 그 이상이고, 인간 악행의 총합이라는 단순한 등식 그 이상이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죄는 해소되지 않는 두 가지 역설적 긴장을 담고 있다. 즉 사람은 자발적으로, 하지만 불가피하게 죄를 범한다. 사람은 죄를 자유롭게 선택하지만(그렇지 않다면 죄가 아닐 것이다) 또한 죄로 향하는 ‘중력’, 무능력한 인간이 맞서지 못하는 폭압 혹은 지배력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죄를 범하지 않을 자유가 없다.
---「8. 도덕적 의의 문은 닫혀 있다!(3:9-20)」중에서
25-26절에서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 방법으로 계시된다. 과거에 하나님의 의는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시는 길이 참으심을 통해 계시되었다(2:4). 현재에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희생을 믿는 믿음을 통해 계시된다. 여기서 벵겔은 엄청난 역설에 주목했다. 율법에서 하나님은 공정하고 정죄하는 분으로 나타나셨으나, 복음에서는 공정하지만 죄인들을 의롭다고 인정하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오래 참으심과 믿음 둘 다에서 하나님은 계속 공정하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모두 적절하게 표현하되, 어느 것도 타협하지 않았다. 십자가는 잠재의식의 희망사항이나 원형적 형태의 기억(gestalt)이 아니다. 십자가는 역사적 사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의 실증이다. 십자가는 역사적 실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기 때문에(헬라어 시제는 현재를 암시한다), 십자가는 실존적 실재다.
---「9.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의(3:21-31)」중에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언급한다(5절). 기독교적 용례에서 사랑을 가리키는 헬라어 단어 ‘아가페’는 받는 자 편에서의 어떤 장점과 상관없이 오직 선물을 주는 이에게서만 기원하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이것은 조건부의 ‘만약에’ 사랑도 아니고, 성취된 ‘때문에’ 사랑도 아니며, 과분한 ‘불구하고’의 사랑이다. 10절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셨다고 증언한다. 일반적으로 무가치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는 대상의 가치를 지적함으로써 정당성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받는 이가 돌려주는 보답을 통해 정당성을 얻으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의 대상이 자신 안에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선사한다. 사랑의 변혁적인 힘 자체가 존재 이유가 된다.
---「12. 하나님의 변혁하는 사랑(5:1-11)」중에서
이 버림받음의 외침은 공허한 우주 속의 최종 결론이 아니다. 이 외침은 은혜의 전주곡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감사’를 가리키는 헬라어는 ‘은혜’와 동일한 단어다. 이 찬양은 8장 전체의 승리의 후렴구에서 울려 퍼지는 바울 복음의 중추를 보여 준다. 우리는 절망의 구덩이 속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보여 주셨다. 인간적인 희망이 바닥났을 때, 구원은 가까이에 있다. 사람으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소망할 수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는 다시 일어날 수 있다.
---「17. 내재하는 죄의 권능(7:7-25)」중에서
열여섯 발의 예포가 울려 퍼지듯, 겨우 아홉 절 안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열여섯 번이나 언급하는 경쾌한 반복을 통해 그 신실하심이 얼마나 확실한지 찬양한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범위는 보편적 절대성을 통해 암시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들에게 맞서는 능력은 아무것도 없다. 그들을 비난할 자는 아무도 없다.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그들에게 주어졌고, 모든 것이 그들을 위해 역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에 넉넉히 이긴다.… 은혜는 이 세상이나 그 위험으로부터 달아나는 도피 수단이 아니다. 오히려 은혜는 아가리를 벌린 심연과 냉혹한 공포 앞에 일어나서, 그런 건 하나님의 꺾이지 않는 사랑의 상대가 전혀 아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패할 수 없고, 우리를 놓아주지도 않을 것이다.
---「20. 하나님의 꺾이지 않는 사랑(8:31-39)」중에서
이방인을 위한 바울의 사역은 자기 백성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질 수 없었다. 반대로, 이방인을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바울의 선교는 유대인 중 일부를 구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여기에 엄청난 역설이 있다. 즉 이방인 선교의 성공은 유대인 선교의 성공을 위해 극히 중요하며, 유대인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의 성취에서 일부를 차지했다. 감람나무 비유가 보여 주듯이 이방계 그리스도인이 유대인을 대체하지 않았고, 그들은 유대인을 향해 자랑할 수도 없다. 오히려 이방인의 믿음과 제자도는 자신들이 구원을 얻는 것 외에 이스라엘의 최종적 구원에 일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인에게 보내는 본문에서 유대인에 대한 자신의 소망을 기록한다. 지금 동족 유대인을 위한 그의 최선의 봉사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26. 땅 끝까지 이르는 구원(11:11-24)」중에서
이전 단락에서 바울은 사랑과 시민의 책임을 연결했고, 여기서는 사랑이 최고의 행복감이라는 인식에 반대한다. 사랑은 동떨어진 어떤 세계가 아니라,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사랑은 율법을 초월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다 이루는” 것이며(8절), 계명을 지키는 것은 ‘아가페’의 표현이다. 바울은 9절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십계명 전반부를 인용하지 않고, “남”을 공경하는 십계명 후반부를 인용한다. 이것은 우리가 앞서 다룬 논지의 명시적 확증이다. 즉 율법을 지키는 것이 구원하는 믿음의 전제 조건이 아니라, 구원하는 믿음이 율법을 지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3:31). 사랑은 타인을 향한 관계와 책임으로 표현되는 믿음의 가시적 측면이다. 율법은 사랑으로 성취되고 “완성”된다. 사랑은 율법의 의도를 꿰뚫고, 이를 통해 계명이 규정한 외적 최저 기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31.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13:8-10)」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