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3일(금)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기독교 친일청산연구소 주최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재조명하는 학술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신사참배 거부는 항일운동이다.’라는 주제 아래 열린 학술세미나는 일제에 항거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펼친 한상동, 조수옥, 안이숙, 최덕지 등을 재조명했는데, 최덕성, 이은선 교수가 주제발표를 했고, 필자는 침례교단 대표로 좌장과 패널로 참여하였다. 본 세미나를 통해 신사참배에 대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하는 등 의미 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으나, 한 가지 아쉬웠던 것은 참석자 대부분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한국의 침례교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함으로 일제에 의해 교단이 폐쇄되고, 많은 탄압과 수난을 받은 것에 공감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별한 논의가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거론된 여러 인물 중에 해방 후 침례교 목사의 사모가 된 안이숙 여사(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장로교인 이였으나 해방 후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한인침례교회 담임인 김동명 목사와 결혼하여 침례교인이 되었음)를 다룸으로 그나마 체면을 세웠다.
기독교한국침례회는 2015년 제105차 정기총회(유영식 총회장)에서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교단이 폐쇄된 날(5월 10일)을 교단 기념일로 가결하고, 이듬해인 2016년 5월 10일 강경의 ㄱ자 교회터에서 2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신사참배 거부 기념 예배를 성대하게 드렸다. 그러나 단발성 행사에 그친 채 6년간 중단되었다가 2023년 5월 10일 김인환 총회장의 주도로 다시금 강경의 ㄱ자 교회터에서 신사참배 거부 기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왜 그동안 신사참배 거부 기념 예배가 중단되었던 것일까? 신사참배를 이미 재개되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신사참배를 이미 지나간 과거의 역사로 여겨 문제의 심각성을 망각한 건지 아니면 오늘 우리와 관련이 없다고 가볍게 여겨 무관심한 건지 알 수 없으나 이 사건의 역사적 중대성 및 심각성을 생각할 때, 참으로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한국교회사에서 신사참배는 비록 일제의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 하나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훼손되고, 우상숭배를 했다는 측면에서 가장 큰 배교적인 사건이었음은 틀림없다. 그러기에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건이다.
우리가 잘 아는 논어(論語)의 위정(爲政) 편에 나오는 문장 하나를 인용해 보자.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알면, 다른 사람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여기서 그 유명한 “온고지신”(溫故知新)이 나왔는데, 이것은 철저한 역사의식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가져야 할 역사의식(歷史意識)은 과거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바로 아는 역사인식(歷史認識)에서 시작된다. 즉 현재의 신앙은 과거와 무관하지 않으며, 오히려 과거를 바로 알 때 비로소 바람직한 미래를 열 수 있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거울)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고린도전서 10장 11절)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비록 늦었으나 지금이라도 과거 일제강점기에 자행됐던 일제의 악랄하고 간악했던 탄압과 박해의 참상을 바로 알고, 이에 맞섰던 우리 침례교 선진들의 신앙과 정신을 타산지석(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아 오늘에 계승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한 학문적 연구가 필요하며, 본 글은 이를 공론화, 대중화를 위한 하나의 거보(巨步)이다.
---「프롤로그」중에서
일제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무려 7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한국교회 역사는 오늘까지 뜨거운 이슈로 혹은 상처로 남아있다. 특히 신사참배문제가 그렇다. 비록 교세적인 측면에서 당시 한국 기독교계 중에 침례교가 지극히 작은 소수의 교단에 불과하여 그 영향력이 미미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를 통해 대쪽같은 신앙의 절개를 지킴으로 교단의 정신이 살아있음을 만방에 표출했다. 필자가 정확히는 기억할 수 없으나, 과거 어느 공익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
모두가 Yes라고 답할 때 No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모두가 No라고 답할 때 Yes라고 말하는 사람!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기독교계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신사참배에 “Yes” 할 때, 오직 침례교만큼은 교단적으로 “No” 함으로 많은 탄압과 박해를 받았다. 이는 외로운 길이었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생명을 길이었다. 그분들은 약속된 성경의 말씀을 굳게 믿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일제에 항거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들에게 시치느니라. 이같이 저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장 10-16절).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기꺼이 박해를 택했던 침례교인들, 신앙을 지키기 위해 욕을 먹으며 탄압을 감수했던 침례교인들, 모두 성경의 약속대로 천국이 그분들의 것임을 확신한다. 그분들은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신앙의 부패를 막고자 했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고자 했다. 그들은 작은 불꽃이었으나, 시대를 밝힌 불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분들의 신앙을 기리며, 뇌성마비 시인 송명희의 “작은 불꽃이여”라는 시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작은 불꽃이여, 작은 불꽃이여,
그대에 빛을 밝히어라.
작은 불꽃이여, 작은 불꽃이여,
그대에 빛을 밝히어라.
저 어두운 세상을 그대에 빛으로,
저 어두운 세상에 크게 비추어라.
비록 그대는 작은 불꽃이나,
어두운 세상에 비추이면
큰 빛 되어서 발하리라.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