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대들의 세계를 흔드는 작가 이꽃님의 신작이 나왔다. 이번 소설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웃음과 희망, 기쁨은 없다. 좋아하는 마음 이면에 숨겨진 어두운 그것, 청소년들의 관계 맺기에서 벌어지는 문제를 날것 그대로 끄집어낸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나를 바꾸는' 건 사랑일까, 정말 괜찮은 걸까? - 박정윤 청소년PD
기억나? 우리가 저수지에 갔을 때 말이야. 그날 유난히도 어두웠잖아. 태어나서 내가 겪은 수많은 밤들 중에 제일 어둡고 외로웠던 밤이었어. 내가 그 밤을 잊을 수 없는 만큼, 너도 그날을 잊지 못하겠지. 그런데 그거 알아? 그날 일을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는 거. --- p.7
“좋아. 그럼 다시 물을게. 저수지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 경찰이 나를 빤히 보더라고. 그러고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어. “내가 시간이 남아돌아서 여기까지 찾아왔다고 생각하나 보네.” “…….” “해록이가 사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만난 사람이 너야. 널 만나서 저수지에 같이 갔고 그 뒤로 실종됐어. 너희가 탔던 저수지로 가는 버스 CCTV도 확보했고.” --- p.23
내가 바라던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에 모든 게 완벽했어. 바로 뒤따라 그 짜증 나는 웃음소리만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말이야. “크큭.” “닥쳐, 새끼야. 들리잖아.” 웃음소리와 웅성거림이 바람을 타고 내 귀에 꽂혔을 때 등 뒤로 오스스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 산뜻하고 시원하던 바람이 한순간에 불쾌하게 바뀌던, 그 섬뜩함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 p.57
‘개 버릇 남 못 준다더니, 너 여전하다?’ ‘너 여전하다?’ 여전하다……. 여전하다는 말은 예전에 알고 지낸 사람한테나 쓰는 말이잖아. 그걸 이제야 눈치챈 거야. 채호의 눈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커졌고 나는 혀끝부터 느껴지는 쓴맛을 참아 내려고 입을 다물었어. --- p.109
무슨 말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데 어떤 말을 해야 네가 내 말을 믿어 줄까. 그래, 우리 이야기가 낫겠다. 끝까지 경찰에게 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려고 해. 오로지 너와 나만 아는 이야기. 저수지에 가기 전부터 그날 네가 그곳에서 실종될 때까지, 우리에게 있었던 일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