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롯은 두려웠습니다. 세례 요한을 죽일 수 있는 권력이 자기 손에 있었지만, 그 두려움의 문제를 떨치지 못했습니다. 권력은 결코 두려움의 해결책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은 죽일 수 있어도 두려움마저 죽이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대중의 주목을 받자 “세례 요한이 살아난 것 아니야?” 하고 걱정하는 모습에서 헤롯이 얼마나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도 자신의 모순이 드러나는 시점이 있습니다. 부부 사이에 혹은 자녀들 앞에서 이런 순간이 올 수 있습니다. 그때 그저 얼버무리거나 억누르고 지나가는 것은 좋은 기회를 놓치는 일입니다. 자녀들을 위한다고 생각한 일이 오히려 짐을 지어 주는 결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가족들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주고 싶었는데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을 부립니다. 머릿속에 그려 놓은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교회 사역을 하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선한 동기로 시작했는데 자존심과 오기만 남을 수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모순들이 드러날 때 우리가 어떻게 결단하는지가 중요합니다. (3장. 행복숭배 시대의 기쁨)
--- pp.71~72
20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 다시 한국에 돌아온 지금 자문해 봅니다. ‘나는 여전히 그때와 같이 설교할 수 있을까?’ 솔직한 심정으로 자신이 없습니다. ‘좋은 대학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인 양 자신을 몰아세우며 청소년 시기를 보내고 대학을 졸업했음에도, 학사모를 쓴 날 오후에도 공무원 시험 학원으로 달려가야 하는 젊은이들, 수십 통의 이력서를 쓰고 또 쓰지만 이 역시 “광탈”(광속탈락)할 것임을 알고 있는 취업준비생들에게 어떤 종류의 성실함을 요구할 수 있을까?’ ‘월급도 주지 않는 착취를 인턴이라는 제도로 합리화하는 파렴치한 기업에게조차 일방적 연모를 버리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저 주어진 일에 감사하고 충실하라”는 말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껏 취업했지만 비정규직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은 성실히 일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 가운데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하려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5. 비정규직 800만 시대의 직장문화)
--- pp.101~102
다윗이 처음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다윗과 골리앗 이야기’의 초반부를 살펴보면(삼상 17:12-40), 한 사람의 잠재력이 확인되고 성취되는 과정이 선연히 드러납니다. 다윗으로부터 얻는 교훈을 다음과 같이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평소에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동시에 기회에 민감하라.” 주위를 보면 주어진 일을 성실히 잘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큰 꿈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며 여기저기 다니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두 요소가 모두 중요한데 둘 다 겸비한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다윗이 바로 그러한 사람, 곧 주어진 일을 충실히 행하는 동시에 기회에 민감한 사람이었습니다. (6. 힐링 시대의 신앙)
--- p.149
무엇보다 내가 변해야 합니다. “예배가 좋다. 내 마음을 만진다”는 마음이 들었다면, 분명히 내가 순종하고 바뀌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설교를 들으며 보통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나 내 생각을 합리화하는 대목에서 “은혜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은혜를 받았다면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내가 틀렸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교회에 왜 옵니까? 나 혼자 잘살 수 있으면 교회에 올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잘났으면, 내가 최고면, 예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니까 예배하러 오는 것입니다. 카프카는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우리를 찌르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오직 그런 종류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습니다. 예배야말로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8. 엔터테인먼트 시대의 예배)
--- p.191
우리가 잘 아는 ‘코이노니아’ 역시 그리스 폴리스의 정치적 용어였습니다. 우리는 ‘교제’, ‘사귐’이라는 말로 알고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를 가리켜 ‘시민의 정치적 코이노니아’라고 했습니다. 정치적 ‘참여’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교제, 사귐, 경제적 나눔, 정치적 참여까지 포괄하는 이 단어를 교회론의 핵심에 사용함으로써 바울과 요한 같은 신약성경 기자들은 세상의 소망이 되는 공동체를 세워가는 소명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서로의 삶을 나누고 돌보며 경제적인 부분까지 포함하여 서로 돕고 보살핌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공동체의 이상, 그리스의 정치적 공동체인 폴리스와 에클레시아가 목표로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이상을 교회를 통해 실현할 수 있다는 비전이었습니다. 고린도나 빌립보에서 수십 명이 모이는 조그마한 공동체에 인류를 위한 새로운 공동체의 비전을 기대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교회의 건강한 성장에서, 교회가 로마 사람들에게 보여준 흡인력에서, 마침내 로마제국조차도 그 활로를 교회의 모델에서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코이노니아 비전의 현실성은 증명되었습니다. 물론 그 구체적인 실현 과정에서 왜곡된 점이 있지만, 신약성경의 코이노니아는 여전히 우리가 돌아가야 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노력의 출발점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11. 시민주권 시대의 참여)
--- pp.281~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