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시민이 되면 내적 변화가 보이기 시작하며 회개에 합당한 열매들이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자들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화와 기쁨과 즐거움과 자랑하고 싶은 것들과 같은 성령의 열매들을 경험한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거부하고 회개함이 없이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고 온갖 악한 세상과 육신의 정욕과 악에 빠져 고집스럽게 걸어가던 그 길을 계속 가면 도착지는 하나님이 없는 영원한 지옥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알고 믿고 그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사랑으로 들려주어야 한다.
--- p.40
한국 교회 아버지 길선주 목사님께서 몸과 삶에 지니셨던 특징 하나를 소개합니다. 맨날 울면서 회개의 고백을 하신 것은 물론이고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천국과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셨다는 것입니다. 길선주 목사님은 요한계시록을 만 독을 하고 암송을 하시면서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한평생을 ‘천국 소망’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어떤 무식한 신학자는 길선주 목사가 지나치게 천국만 바라보았다고 지적하면서 현세의 삶과 사역에 무책임했다고 비판했는데 길선주 목사님만큼 현세의 삶과 사역에 전력한 사람도 별로 없을 것입니다.
--- p.56
그러므로 참된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미래성을 동시에 믿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영적 하나님 나라(spiritual kingdom of God)가 여기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자신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아서만 이 현존하는 하나님 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 그 나라 백성으로 열심히 살면서, 동시에 이 땅에 영적으로 임하여 왔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나라의 극치(consummation)에 이를 것을 고대하면서 날마다 “나라이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기를 주님의 재림 때까지 그치지 않는 것이다.
--- p.74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을 위한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강한 열망이며, ‘하나님 나라’(Gottes Reich)는 ‘하나님의 통치’(Gottes Herrscha)를 의미한다. 블룸하르트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 대신에 ‘하나님의 통치’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 하나님께서 주관하여 이루시고 통치하시는 나라임을 분명히 명시하였다. 블룸하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 주관자가 되어서 통치하시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 나라이며, 그 나라는 우리의 삶을 통해 구체적 현실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블룸하르트는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즉시 이루어지는 현실로 드러나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로써 그의 신학사상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하게 확신하였다.
--- p.108
그러나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U-topos(없는 장소, Nirgendwo)라는 뜻과 같이, 인간이 시도했던 유토피아들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유토피아는 이 땅 어디에도 없고, 이 땅 위에 세울 수도 없는, 다만 공상적인 곳일 뿐이다. 그러므로 유토피아는 항상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도모였으며, 항상 파괴되었다. 그래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들은 대를 이어 가면서 이 역사 안에 유토피아를 거듭 세우려고 시도하였고, 앞으로도 이 인간의 허망한 욕구로 변함없이 유토피아를 갈망하며 지속적, 반복적으로 세워 나갈 것이다.
--- p.136
일곱째, 바이어하우스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시대의 표적들”(the signs of the time)을 통하여 인식된다(마 16:3; 눅 21:11-25).80 이러한 표적들은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옛 시대가 파괴되는 것이다. 그때 거짓 선지자들과 가짜 메시아들이 출현할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표적들 중에는 복음이 모든 민족 가운데 선포되는 일과 이스라엘의 회개가 포함된다(롬 11을 보라. 마 24:14; 막 13:10도 참조).81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표적들이 사회정치적 변화로 대체되어 버릴 때 심각한 오해가 일어난다. 그러한 변화는 교회를 통하여 일어날 수도 있지만, 비기독교 운동을 통해서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전하신 말씀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막 16:17-20).82
-p.198
그러나 유토피아니즘과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기독교의 희망 사이에 현격한 차이점이 존재한다는 것은, 유토피아니즘이 희망하는 것을 기독교가 모두 반대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는 유토피아니즘을 통해 이 세계의 불의하고 잘못된 현실을 개혁해야 할 필요성과 지향점을 부여받을 수 있다. 물론 기독교는 유토피아니즘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박탈하고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폭력도 정당화하며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을 대체시키면서까지 유토피아를 이 땅 위에 세우고자 한다면, 이를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 p.247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신학의 상징적인 인물 호켄다익은 구속사와 세속사의 이중 역사관을 버리고, 일원론적 역사관을 주장하였다. 구스타프 바르네크(Gustav Warneck)는 비기독교인에게로 가서 교회를 조직하고 세우는 행위를 선교라고 했는데, 호켄다익은 이러한 선교관을 비판하며, 기독교 지역과 비기독교 지역, 신자와 불신자의 지역으로 따로 나누고 신앙인이 그 경계선을 넘어서 비신앙인들에게 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선교관을 비판하였다. 하나님은 전체 피조물과 교제하기를 원하시며, 하나님의 최종 목표는 교회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교회는 다만 세상의 ‘한 조각’이며, 세상에 부과된 ‘하나의 첨가물’(postscript)일 뿐이라고 하였다.
--- p.2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