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이 이성계에게 의탁한 것도 이성계의 사람 보는 눈 때문이다. 정도전은 조선 치국의 지침서로 만든 《조선경국전》에 ‘통치의 열쇠는 오직 용인이다’라고 기록했다. 물론 이 책은 이성계에게 바쳤다. 다행히 이성계는 출신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발굴해 내는 능력이 있었다. 고려가 돌이킬 수 없는 난세라는 것은, 기존 인재 등용 방식의 효용 가치가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런 안목으로 인재를 고르면 전통이 야기한 난국을 돌파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성계는 기존 인재상과 다른 인물을 발탁했고, 그들의 가치를 인정해 주었다. 정도전, 이지란, 무학대사 등이 그들이다.
--- p.30
목적 달성에 효과적이기만 하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태종은 한마디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살았으며 원하는 목적을 확실히 이루었다. 태종 같은 결과 지향적 리더들은 항시 ‘왜’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 다음 그 해답으로 ‘어떻게’를 찾는다. 즉 과정은 목적을 이룰 수 있을 때만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 p.46
왕의 진정한 힘은 사회적 신뢰의 크기로 가늠한다. 신뢰받는 왕은 그 자체로 자부심도 있거니와, 백성의 자발적 단합으로 어떤 과제도 해결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왕이 이기적이거나, 측근 몇 명만 야합하는 정치를 할 때 사회적 신뢰는 하락한다. 세종은 신하는 물론 백성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가치를 추구했다. “조선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이것이 세종의 통치철학이었다.
--- p.71
조선의 어느 시기인들 왜 인재가 없었겠는가. 그런데도 세종과 정조 때 유달리 많은 인재가 부각된 것은 두 왕의 구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인재가 인재를 부르는 인력의 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두 왕 주변에 인재가 많았던 이유는, 우선 본인들이 영민했기 때문이다. 굳이 왕이 최고의 지식과 재주를 겸비할 필요는 없다. 누가 최고의 재주를 가졌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등용하면 된다. 영민하다는 것은 ‘포용력’과 ‘방향 설정력’이 있다는 뜻이다. 인재일수록 까다로운 경우가 많다. 이들을 포용하고, 이들의 역량이 긍정적 결과 창출에 집중되도록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p.91
태종과 세조는 여러모로 닮았다. 둘 다 장자가 아니라 왕위 계승에서 밀렸지만 개인의 지략과 집념으로 왕이 되었다. 두 왕 모두 권력욕의 화신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권력 장악과 유지가 욕심만으로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의 역량이 있어야 한다. 세조는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했지만, 창조적 상상력과 위기관리 능력이 있었고, 특히 인재 식별력과 기회 포착력이 탁월했다. 리더에게 절호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지만, 설령 왔다고 해도 자기 몫으로 만들어야 가치가 있는 것이다. 세조는 작은 기회(small opportunity)를 도약의 기회(big chance)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 p.123
연산군은 고립을 자초했다. 왕은 솔로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같다. 기본적으로 세력 관계를 잘 형성해야 한다. 연산군은 이를 간과했다. 무오사화로 사림을 제거하고, 갑자사화로 훈구 세력을 제거했다. 이로써 조선 초기 양반 관료를 구성한 훈구파와 사림파 모두를 적으로 돌렸다. 두 세력을 적절히 이용하거나 한 세력이라도 우군으로 삼았어야 했다. 게다가 백모까지 겁탈해 왕실 세력까지 적으로 만들었다. 12년 집권 동안 연산군은 주변 세력을 다 쫓아냈을 뿐 아니라 여염집 아낙네를 빼앗고, 사냥에 방해된다고 민가를 허무는 등 폭군 노릇을 해 백성들의 환멸을 샀다.
━ p.194~195
광해는 아무리 바빠도 명나라와 여진족의 동향 보고만큼은 지체 없이 받으며, 명나라가 수명을 다했다고 보았다. 더욱이 여진족이 조선을 수탈하며 오만하게 대한 것과 비교해 여진족을 훨씬 관대하고 개방적으로 대했다. 하지만 성리학이 신앙이었던 조선 사대부들에게 성리학의 본고장인 명나라는 영원한 조선의 종주국이어야 했으며 청나라는 오랑캐였다. 이들의 친명 사상이 광해의 실리외교를 저지한다. 이를 억누르며 광해는 조선이라는 배의 선장이 되어 15년간 방향을 제대로 잡고 항해했다. 그동안 이 배의 주인으로 행세하던 사대부들은 광해가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한 것을 빌미로 선상 반란을 일으켜 조선호의 항로를 돌려놓는다.
--- p.249
리더의 미래란 현재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끊임없이 추구하고 달성하려는 그 무엇이다. 왕이 초점을 미래 성과에 맞출 때, 타이밍에 맞는 이슈를 선별하고 주도해 낼 수 있다. 현종 당시 세계는 기초과학과 통상무역이 발전하고 있었고 이에 앞선 나라들이 식민지를 확장하고 있었다. 현종이 조선의 방향을 이런 흐름에 맞추었다면 예송 논쟁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모인 조직에서 이슈는 항상 있게 마련이다. 성과와 크게 관계없는 논쟁은 가능하면 짧게 끝내야 한다. 격화하면 할수록 리더의 정통성에 흠집만 나기 때문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들기도 하지만, 진정한 영웅은 이슈를 만들어 시대를 개척한다.
--- p.295
경종 독살의 의혹 속에 즉위한 영조는 의혹설을 이용해 주도권을 행사하려던 노론에 맞서 네 당파를 고루 등용해 제어했지만, 노쇠해진 말년에 이르러서는 제어력이 약해졌다. 결국 사도세자를 죽게 하는 조선 왕실 초유의 비극이 발생한 가운데, 손자 정조를 두고 여든셋에 승하했다.
--- p.354
사대부들은 북학파가 신분을 타파해야 한다고 주장하더니, 양반들더러 천한 장사까지 하라고 하니 더는 참기 어려웠다. 마침 1790년이 청나라 건륭제의 팔순이라, 정조가 북학파를 북경에 다녀오게 했다. 사대부의 공격을 일시 피하라는 뜻이었다. 그래도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1792년 정조가 ‘문체반정’이라는 사상 정화 카드를 꺼냈다. 유행하는 문장이 규범에 어긋나므로, 정통고문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 p.385
고종은 집권 초 10년은 흥선대원군에게, 친정 후에는 민비에게 휘둘렸으며, 헤이그 특사 파견 후 일본에 의해 퇴위되었다. 순종은 일본이 강제로 씌워준 왕관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변화의 시기에 주도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외력에 의해 강제로 변질되게 되어 있다. 똑같은 시기 일본은 국제 변동에 적극적으로 부응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설 수 있었다. 그다음이 청나라였고, 조선이 가장 뒤처졌다. 그래서 주권까지 강탈당한 것이다.
--- p.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