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난파할 때는 모든 계층이 갑판 위에서 만나는 법이다.
--- p.26
어둠 속에서 위험은 점점 커져갔다. 사람들은 고요한 공기 속에서 불안을 들이마셨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냉철하고 침착했던 사람들조차도 그 혼란스럽고 치명적인 공포를 극복할 수 없었다. 모두가 애타는 심정으로 자기 집을 바라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내일이면 폐허로 변하고 말 거야. 내일이면 난 빈털터리가 될 거야. 아무에게도 해를 끼친 적이 없는데, 도대체 왜?’ 하지만 곧 담담함의 파도가 그들의 영혼을 집어삼켰다. ‘저따위 것들이 무슨 소용이야! 결국은 돌맹이야, 나무일 뿐이야, 생명 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아! 무엇보다 목숨을 구하는 게 중요하지!’ 조국의 불행을 생각한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 있었다고 해도 그들은 아니었다. 그날 밤 파리를 떠나는 사람 중에는 없었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는 동물적인 본능이 아닌 모든 것, 피부로 느끼는 움직임이 아닌 모든 것을 마비시켜 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들쳐 업고 달아나는 일! 그날 밤에는 살아 있는 것, 숨 쉬고 울고 사랑하는 것만이 가치가 있었다! 재산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연인이나 아이를 품에 꼭 안았다. 나머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나머지는 화염에 휩싸여 사라져도 괜찮았다.
--- pp.68~69
엄밀히 말해, 그것은 불안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투지도 희망도 찾아볼 수 없는 이상한 슬픔이었다. 죽음을 기다리는 짐승, 그물에 갇혀 어부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물고기의 눈에 깃든 것과 같은.
--- p.93
기독교의 자비심, 수 세기에 걸친 문명사회의 너그러움이 헛된 장식처럼 벗겨지고 그녀의 메마른 영혼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 적대적인 세상에 오로지 아이들과 그녀뿐이었다. 새끼들을 먹이고 보호해야 했다. 나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 p.105
그들은 자신이 왜 달아나는지 알지 못했다. 프랑스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고, 어딜 가나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조차 몰랐다. 지쳐 길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은 일어설 수 없다고, 차라리 그 자리에서 죽겠다고, 어차피 죽을 거라면 편히 있다가 죽는 게 낫다고 말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다가오면 그들이 제일 먼저 일어섰다.
--- p.107
그 말 한마디의 인간적인 울림이, 그 몸짓이 독일군이 피에 굶주린 괴물이 아닌 여느 젊은이와 다를 바 없는 청년이라는 사실을 증명했고, 그러자 갑자기 마을과 적, 농부와 침략자 사이에 놓인 유리 장벽이 깨졌다.
--- p.192
페리캉 부인은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소리치며 속으로 끊임없이 빌었다. ‘그들이 우리에게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기를! 폭탄이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에게 떨어지기를! 오 주님, 저에겐 세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폭탄을 떨어뜨리지 않게 해주소서!
--- p.209
그들에게는 언제나 행복에 대한 열렬한 의지가 있었다. 서로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에 그날그날 살아가는 법을, 내일을 의도적으로 잊는 법을 터득했다.
--- p.317
“도대체 왜 고통은 늘 우리 몫이죠? 우리 같은 사람, 평범한 사람, 서민들 말이에요. 전쟁이 일어나거나, 프랑스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거나, 실업률이 올라가거나, 위기나 혁명이 닥치면, 다른 사람들은 멀쩡하지만 우린 늘 무참하게 짓밟히고 말아요! 왜죠? 우리가 도대체 뭘 어쨌기에? 모든 잘못의 대가를 왜 늘 우리가 치르냐고요. 물론, 사람들은 우릴 두려워하지 않죠! 노동자들은 똘똘 뭉쳐 자신의 권익을 지키고, 부자들은 막강한 돈의 힘을 휘두르니까. 그저 제일 만만한 게 우리죠! 난 그 이유를 묻고 싶어요!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난 이해할 수가 없어요. (...)”
--- p.332
“우리랑 상관없이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있어요. 폭풍우가 몰아칠 때 당신은 아무도 탓하지 않아요. 상반되는 두 종류의 전하가 벼락을 만들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구름이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도. 당신은 그들을 탓할 수 없어요. 그건 우스꽝스러운 일일 거예요. 그들은 당신 말을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 p.333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심각한 사건들이 사람의 영혼을 바꿔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갑자기 불어닥친 바람이 낙엽을 쓸어내고 나무의 형태를 드러내듯, 그 영혼의 면면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주었다. 그 사건들은 어둠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백일하에 드러내며, 이제 영혼이 가야할 방향으로 이끌었다.
--- p.338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이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그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것도, 적어도 살아 있어서 시간에 의해 변질되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아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것도, 자식을 갖지 않은 것도, 모두 잘 한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바보였다. 오로지 자신만이 현명했다.
--- pp.340~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