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소심해서 탈이다. 내가 얼마나 소심하냐면, 세상이 멸망해서 집에 먹을 게 하나도 없는데 밖으로 나갈 엄두를 못 내고, 창밖을 내다보면서 어쩌면 좋을지 소심하게 고민만 하고 있었다.
“수면 바이러스 때문에….”
나는 중얼거렸다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혼자 지낸 기간이 길어서인지 갑갑하면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겨서, 나중에는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럴까 봐 주의하고 있었다. 얼른 입을 다물고 생각했다.
‘수면 바이러스 때문에 나갈 수가 없지.’
수면 바이러스 때문에 세상이 멸망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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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나 님은 ‘괜찮으시다면’을 말에 붙이는 버릇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걸 쿠션어라고 하나, 듣는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되도록 돌려 표현해서 말했다. 아마도 배급소에서 사람을 많이 상대해서 상대방한테 부드럽게 들리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나는 나나 님이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사실 내 배급은 언제 배달되는지부터 묻고 싶었다. 하지만 말하는 도중에 말을 자르면 나나 님 기분이 상할 것도 같았고, 땡볕에서 힘겹게 상자를 들고 가던 사람한테 내 물건은 언제 오냐고 묻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나 자신이 참 소심하다 싶으면서도, 아무튼 계속 나나 님 말을 들으며 뒤를 따라갔다.
--- p.25
처음 수면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했을 때, 도시를 떠나서 사람이 적은 지역으로 피난을 가야 한다거나, 산속처럼 동떨어진 곳에 벙커를 만들고 숨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전쟁이 터지지도 않았는데 왜 ‘피난’을 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고, 그래서 밖에 나가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 그 사람들은 정말 산속에 가서 벙커를 만들었을까? 그리고 다들 그곳에서 잠들었을까? 지우가 지리산에 사람들이 많이 잠들어 있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본 적 있다고 말했다.
--- p.49
“저 사람들 이름이 워리어스인가 봐요.”
이름까지 정해서 무리를 만들고 마트를 차지하다니, 세상이 멸망했다고 정말 저런 사람들이 생기다니 겁이 났다. 지우는 워리어스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먼저 워리어스를 무찔러야 한다고, 불화살을 만들어 쏴서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는 작전이 어떠냐고 말했다. 불을 지르라니, 나는 전혀 그러고 싶지 않았고 나나 님도 같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걱정이었다. 저 사람들이 우리 동네로 오면 어쩌지? 마트에 못 들어가면 서윤이가 먹을 쌀은 어디서 구하지?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을까?
--- p.59
낯선 곳이어서 그런지 깊이 잠들지 못하고 중간에 자꾸 깼는데, 새벽에 잠시 잠에서 깼을 때였다. 플라네타리움에서 흘러나오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 사이로, 나나 님의 잠꼬대가 들렸다.
“술… 장부 적는 걸 깜박 잊었네….”
와인을 장부에 안 적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는 지우의 잠꼬대가 들렸다.
“오늘 말을 많이 했어… 쓸데없이 왜 그랬지, 부끄럽게…. 내일은 그러지 말자….”
--- p.90
“미용실 사장님 생일 파티 소식 들었어?”
생일 파티라니 무슨 말인가 했다. 미용실 사장님이 곧 생일이니까 생일 파티를 열겠다면서 아는 사람을 전부 초대했다는 거였다. 나중에 단체 카톡방에도 초대장이 올라왔다. 잘 모르는 사람의 생일 파티라니, 나처럼 집 밖으로 안 나가는 사람에게는 무섭게 들렸다.
“소심한 사람들의 생일 파티라, 흥미롭군요. 후후후.”
지우가 말하더니 계속 ‘후후후’ 하고 웃었다.
--- p.160
기장 대학병원은 이전에 부모님이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 와본 적 있었다.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병원 전체가 바이러스 환자로 꽉 차 있다는 거였다. 구급대원 님은 환자들이 잠들어 있으니 조용히 해야 한다고 구급차도 조심조심 속도를 늦춰서 움직이고, 미용실 사장님이 누워 있는 들것을 내릴 때도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움직였다. 우리도 소리를 내지 않고 조심조심 걸었다. 병원 출입구에도 ‘환자들을 위해서 조용히 해주세요’라고 큰 글씨로 써놓은 종이가 열 개쯤 붙어 있었다.
---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