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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

: 만성질환 혹은 이해받지 못하는 병과 함께 산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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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7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140*220*30mm
ISBN13 9788960519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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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D 한마디

아프지만 고통의 원인을 아는 것만으로 낫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반대는? 두렵다. 이 책을 쓴 저자 메건 오르크는 10년 동안 아팠지만, 현대의학은 왜 아픈지 밝혀내지 못했다. 이른바 '만성질환'. 병명을 찾아 헤맨 10년의 기록은 아픔이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한다. - 손민규 인문 PD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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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이야기는 보통 깜짝 놀랄 사건으로 시작한다. 슈퍼마켓에서 쓰러지거나, 정기 검진에서 복부에 혹이 잡힌다거나, 의사에게서 전화가 오는 식이다. 내 경우는 다르다. 나는 헤밍웨이 소설에서 파산한 이야기를 하듯 아팠다.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 p.15

“검사 결과를 확인하기 전이지만, 아마 환자분은 자가면역질환의 한 종류를 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느낀 안도감이란 어마어마했다. 일단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 문제는 바로잡을 수 있다. (…) 하지만 6주가 지나도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고, 오히려 나빠졌다.
--- p.36

자가면역질환은 신체가 어떤 이유로 자기 자신의 건강한 조직을 공격하는 항체를 만드는 병이다. 지켜야 할 바로 그 대상에 달려드는 것이다. 자가면역은 몇몇 면역학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와 비자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어, 자기 자신의 신체 조직을 “관용tolerate”하는 일을 멈춘 상태다(자가면역autoimmunity의 ‘자가auto’는 ‘자기 자신self’이라는 의미다).
--- p.41

20세기는 수전 손택의 표현처럼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주장이 의학의 핵심 전제”인 시대였다. 21세기는 의학이 질병 유발인자의 복잡성을 받아들이는 시대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질병 서사도 극적인 시작과 궁극적 치유(혹은 비극적 죽음)로 구성되는 틀에서 벗어나, 보다 섬세하게 변화를 설명하는 이야기로 진화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에서 다수의 환자는 건강과 질병 사이의 회색 지대에서 오랫동안 살아가면서, 안녕한 상태와 증상이 있는 상태를 별 특징 없이 오갈 것이다.
--- p.75

아프면 외롭다. 누가 안쓰럽게 여겨 주고 알아주었으면 하는 어린애 같은 욕망이 생긴다. 그런데 바로 그 알아주는 일이 어렵다. 우리가 아픈 원인이 무엇인지, 증상이 호전과 악화를 반복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아무도 모른다면 고통을 어떻게 설명하고 증명할 수 있을까? 증상이 늘 나타나지는 않는 질병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 p.79

기술 중심의 미국 의료계에서, 아픈 사람은 병원에 가면 사람 이하의 존재로 떨어진다. 이미 20세기 전환기부터 환자가 이제 “차트 위의 숫자, 엑스선 판 위의 그림자, 슬라이드 위의 얼룩”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다는 평론가들의 문제 제기가 있었다고 찰스 E. 로젠버그가 언급했다.
--- pp.96~97

가장 좋은 때에도, 아픈 사람의 파트너로 지내기란 힘들다. 아주 가까운 위치라고 해도, 영원히 유리창 너머에서 환자를 지켜보아야 한다. 짐은 내가 아픈데 본인은 아프지 않아서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내 고통을 너무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하진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 p.139

“내가 증상을 지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가 그렇게나 많을 수 있다니,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거짓말 한다고 인생 좋아질 일 있나요? (…) 운 나쁘게도, 의사들이 내 병명으로 고려한 목록 1순위가 불안이었어요. 의사들은 한두 가지 확인해 보고 아무것도 안 나오면 불안이 문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차라리 ‘문제가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 거예요.”
--- p.165

이처럼 자가면역질환이며 알레르기, 천식, 식품 불내증이 전통 사회에 비해 현대 서구에서 증가하는 이유는 다양한 설명이 가능하다. 위의 논문들을 읽으면서 후기 자본주의 시대가 가하는 압박, 환경오염, 불안, 질 낮은 식품 산업, 항생제 남용, 끝없는 스트레스 요인, 허약한 사회 안전망(적어도 미국은 그렇다)에 관해 생각하게 되었다. 세대마다 자신의 마이크로바이옴과 환경을 해치고, 이를 다음 세대에 넘겨 준다. 다음 세대의 마이크로바이옴과 환경은 식품과 화학물질에 의해 더 손상된다.
--- p.192

자가면역질환을 앓으면 이 면역계가 몸을 방어하는 대신 공격한다. 그러니 자연히 배신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환자는 배신하는 동시에 배신당하는 존재인 셈이다. 은유는 사고방식을 결정짓는다. 항체가 균의 습격에 맞서 싸우는 군인이라면, 자가면역은 아군이 실수로 포격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 이런 암시는 나에게도, 이 책을 쓰는 동안 인터뷰한 사람들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자기 자신을 벌하지 못한 개인적 실패의 결과 병을 앓게 되었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 pp.206~207

나 자신을 보살피며 쉬는 사람이라니, 한번도 그렇게 산 적이 없었다. 계속 일하고 걱정하는 삶은 내 선택이자, 나 자신을 붙드는 닻이었음을 알게 되었다(한 친구가 내게 쉬엄쉬엄 일하라고 조언했다. 내 대답은 “기를 쓰고 네 조언을 따르고 있어”였다. 친구는 ‘기를 쓰고’라는 부분이 목적과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 p.219

사람이 겪는 현실의 존엄성을 품는 일. 바로 그래서 내 이야기를 전할 방법을 알고 싶었다. 내 언어를 찾아내려고 그토록 애썼다. ‘극복’에 실패한 상황을 병적으로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만성질환을 심리적 문제로 치부하면, 환자에게 품위 있게 병에 대처하라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그들의 품위를 앗아가게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 p.241

처음 전기 충격을 겪고 건강 상태가 나빠진 때를 시작점으로 잡으면, 어둠 속에서 15년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내 문제의 이름을 찾게 되었다. 그렇지만 안도감은 느낄 수 없고, 대신 악몽에 빠진 기분이었다.
--- p.254

오랫동안 내게 문제가 있어도 고칠 수 있다고, 답은 바로 앞에 있지만 아무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내가 가장 두려워했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바로 희망을 잃는 일이었다.
--- p.264

“기존 의사들은 맡은 일에 아주 유능합니다. 그렇지만 진단에 딱 들어맞지 않는 증상을 다발로 지닌 환자는 그들이 맡고 싶은 환자가 아닙니다.” 외과 의사 아툴 가완디는 의사라는 직업에 관해 이런 말을 남겼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앓는 환자보다 더 (의사의)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존재는 없다.
--- pp.307~308

내 몸은 이제껏 나를 저버렸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고 있었다. 계속 버림받으리라는 내 생각이 그릇된 모양이었다. 아마도 내 몸은, 삶을 뒤바꾼 심각한 감염에도 불구하고 나를 지킬 능력이 있었고 그렇게 쭉 나를 지켜 왔다.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야 했다.
--- p.327

설명이 안 되는 증상에 만성 라임병 진단을 받으려고 애쓰는 한 가지 이유는, 인간미 없는 현대 의학이 더 나은 설명을 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은 인정받고 싶다. 과학이 입을 다문 자리에 서사가 몰래 숨어든다.
--- p.336

던은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장례식과 결혼식 종소리를 들으며, 인간이 서로 정신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통찰을 구했다. “누구도 그 자체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본토의 일부다.”
--- pp.347~348

만성질환을 앓는다는 것은 매 순간 “위장된 슬픔” 속에서사는 일이라고, 역사가 제니퍼 스팃이 말했다. 병으로 얻은 좋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친구가 조언했을 때, 바로 이 늘 곁에 있는 슬픔이 러그 밑으로 쓸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병으로 무언가 얻기는 했으니 친구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으나, 슬픔을 짚지 않고 지름길로만 가는 충고는 탐구 서사가 얼마나 복잡한지 가리는 효과를 냈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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