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적 지혜는 내 눈에 덧씌워진 모든 분별을 걷어내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28쪽」중에서
이 세상에서 ‘나’에 대한 관념만큼 뿌리 깊고 무서운 것이 ‘진리’에 대한 믿음이 아닐런지요. 지금 『금강경』에서는 그 집착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법이라 부르는 것조차 하나의 이름일 뿐입니다. 궁극적으로는 해탈과 열반 역시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설법은 뗏목과 같은 줄 알아라. 법도 버려야 하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79쪽」중에서
깨달음이란 온 것도 간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내 마음을 가리던 구름이 사라지면, 마음은 본래 평온한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탐욕·분노·어리석음의 번뇌로 얼룩진 사이에도 언제나 밝게 빛나고 있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112쪽」중에서
우리는 ‘나’를 중심으로 편집된 세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내가 본 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영처럼, 그림자처럼, 그 실체는 비어 있습니다. 결국 『금강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지혜, 가장 강력한 무기는 ‘실체 없음’·‘비어 있음’에 대한 자각입니다. ‘공’이라는 용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지만, 경전 전체에서 이처럼 공 사상이 넘쳐흐릅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129쪽」중에서
불교에서 ‘마음을 비워라, 버려라’ 하니까, 학생들은 다 비우고 어떻게 사느냐고 의아해합니다. 배고픈 욕구도 채우지 않고, 아파도 아프다고 생각하지 않고 목석처럼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마음에 감응이 없다면 어찌 살아있는 것이겠습니까. (…) 추구하되, 거기에 묶이지 말라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금강경 147쪽」중에서
불교를 배우는 것은 곧 자기를 알아가는 것이라고도 합니다. 불교를 통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법화경』은 자기의 진실한 가치를 이해한다는 이 중대한 주제에 매우 적합한 경전입니다. 이 경전에서 붓다는 존재에 대한 심오한 통찰을 밝힘으로써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법화경 32~33쪽」중에서
연기의 진리는 실체론적 사유를 부정한다는 점에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계’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사실 시계는 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진 조립품에 ‘시계’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지요. (…)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 또는 ‘자아’라는 것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구성하는 다섯 가지 요소, 오온(五蘊)의 화합에 붙인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법화경 48쪽」중에서
공이란 비어 있다는 뜻으로 어떤 것도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정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모든 존재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법화경 85쪽」중에서
『법화경』의 일불승 사상은 모든 중생이 다 붓다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소승의 불교도는 물론이고, 나아가 동물이자 여성인 용왕의 딸도 성불할 수 있으며, 악인도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 이러한 일불승의 평등은 대상에 차별이 없으며, 목표에도 차별이 없는 평등입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법화경 95쪽」중에서
삶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고도 하지요. 고해를 건너가는 우리의 여정을 누군가가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며 동행해 준다는 것은 마음 든든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스스로 자각하지 못하지만 많은 분의 도움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에는 그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법화경 158~159쪽」중에서
불교의 시선에서 지금, 여기의 ‘나’의 삶은 여러 종류의 고통이 폭류처럼 끊임없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여기의 ‘나’가 목표로 해야 할 궁극의 행복은 어떤 감각적 쾌락으로 고통을 무마시키는 것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를 여의는 것이지요.
---「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 16쪽」중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으나 부족한 ‘나’가 수행을 통해서 완전한 부처님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다른 불교와 달리 『화엄경』은 ‘나’가 그대로 온전한 부처님임을 깨달음으로써 중생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 59~60쪽」중에서
‘나’의 참모습을 알지 못한다면 나는 과거에 매달리고 현재에 집착하며 미래를 걱정합니다. 또 나는 여기에 갇혀서 거기에 이르지 못하여 시방세계에 두루하지 못합니다. 또 나는 ‘나’에 매달리느라 ‘너’를 밀어내고 ‘부처님’을 존경하며 ‘중생’을 깔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무엇에 의거한 것일까요?
---「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 103~104쪽」중에서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따른다면 『화엄경』은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배워서 그전까지 없었던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우리가 이전에 아니었던 어떤 존재나 상태가 되라고 말하는 경전이 아닙니다. 오해의 소지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화엄경』은 무엇을 하기 위한 경전입니다. “‘나’가 온전한 부처님”임을 믿으려는 서원을 일으켜서 부처님이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인문학 독자를 위한 화엄경 146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