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퍼드와 실리콘벨리를 거쳐 인기 유튜브 채널 '철학하는 줄리'를 운영하는 남연주 저자의 첫 책. 사소하거나, 무거운 문제에 직면할 때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존 설, 피터 싱어를 만나보자. 철학은 개인의 삶과 사회 현안에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제공한다. - 손민규 인문 PD
아픈 경험이나 파격적인 생각을 용기 있게 철학으로 승화시킨 여러 철학자처럼 저도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풀어냈습니다. 아마도 이 책을 읽고 나면, 책에 소개된 철학자들은 물론이고 남연주라는 젊은 동시대 철학자와 친구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다양한 철학자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에서 유용한 조언도 많이 담았습니다. 특히 사회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철학의 가르침을 소개합니다. 철학은 많은 이에게 뜬구름 잡는 소리 내지는 추상적인 말장난 정도로 여겨지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학문입니다. 오늘날 실리콘밸리같이 첨단의 선두에 서 있는 곳에서도 몇백 년, 몇천 년 전에 쓰인 철학서를 끊임없이 읽고 그 안의 가르침을 현실에 적용합니다. 분야와 직업을 막론하고 인류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곧 경쟁력이기 때문입니다. --- p.7
신입생 시절의 나는 꽤 어리석었기 때문에 콥 선생님의 조언이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해석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철학을 공부한 지금의 나는 그때 그 조언을 떠올리며 콥 선생님의 지혜에 다시금 감탄한다. 대여섯 가지 선택지를 동시에 바라보며 내게 원하는 것을 뽑을 자유가 있는 것과 내게 주어진 한 가지 선택지를 거부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명확히 다르다. 모자에서 종이 하나를 뽑을 때 그 종이를 뽑는 신체는 내 것일지 몰라도 결정 주체는 ‘운’, 즉 외부 요인이다. 그리고 운명이 내게 정해준 결과를 처음 마주하면 본능적으로 그 결과에 반대할 근거를 찾게 된다. 이런 반발심이 가장 적게 드는 종이를 뽑아 그 선택지에 따르기로 결정할 때 역설적으로 가장 주체적인 결정을 하게 된다. 콥 선생님식 제비뽑기의 또 다른 교훈은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것이다. 진로나 미래에 관해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불안한 이유는 정답이 있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인생에 정답이 이미 정해져 있고 내 선택에 따라 틀리냐 맞느냐가 좌우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무서운가? --- p.34
내 삶도 어떻게 보면 〈프린세스 메이커〉를 플레이할 때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 공주를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선택을 하며 대체 어떤 엔딩에 도달할지 설레는 마음 말이다. 나는 한국에서 외국어고등학교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스탠퍼드에서 철학, 경제학, 언어학, 심리학을 아우르는 학부 전공을 공부하고 철학 석사를 취득했다. 이후 로스쿨 진학을 계획하며 법·경제 컨설팅 회사에서 일하다 로스쿨에 가고 싶지 않고 한국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나는 어떤 선택이 옳은 선택인지보다는 내가 만들어나가는 본질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공주를 만들고자 했다면 퇴사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나는 공주보다는 ‘연주’를 만들고자 했다(라임이 멋지지 않은가?). --- p.40
틸의 질문에 꼭 사업이나 커리어와 관련된 대답을 할 필요는 없다. 그야말로 ‘민트 초콜릿은 맛있다’ 같은 문장도 답이 될 수 있다. 민트 초콜릿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대답의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민초파’가 세상에 생각보다 꽤 많다는 것이다. 틸은 거의 모든 사람이 동의하지 않는 진실을 원하는데 이는 생각보다 찾기 어렵다. 나만의 생각이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많은 사람의 생각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틸의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창의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거의 없을 확률이 높다. 반대로 거의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는 것을 습관적으로 의심하는 사람은 틸의 질문에 내놓을 답변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틸은 의심하는 습관이 성공에 필요한 창의성 및 혁신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 p.45
여기서 ‘가치 있는 프로젝트’란 무엇일까? 울프는 사람들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고 할 때 어떤 욕구를 표출하는지 직관적으로 떠올려보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이 이루고 싶어 하는 의미 있는 삶은 무엇일까? 더 즐거운 삶? 더 많은 목표를 달성하는 삶? 아니다. 울프는 가족, 친구와 돈독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심미적으로 뭔가를 창조하거나 감상하는 것, 인격적 미덕을 수련하는 것, 종교적 활동 등을 예시로 든다. ‘프로젝트’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사실 일시적인 목표보다 오랫동안 꾸준히 쌓는 관계나 활동이 삶에 의미를 더한다고도 말한다. 인생의 의미에 관해 그런 것 따위 애초에 없다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고, 온전히 내면에서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철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생에도 객관적인 기준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에 따른 가치를 열정적으로 더해가는 삶이 의미 있는 삶이라는 울프의 주장이 가장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아무리 즐겁더라도 의미 있다고 인정하기 어려운 일들도, 아무리 힘들더라도 큰 의미가 있는 일들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 p.81
그런데 시기의 대상이 추상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직장 동료의 명품 가방이 부러운 게 아니라 항상 밝으면서 일은 똑 부러지게 해내고 인간관계도 원만해 보이는 동료의 삶 그 자체가 부러운 것이라면? 단순히 내가 명품 가방을 사면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아예 그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라면? 사실 많은 스탠퍼드 학생이 비슷한 고민을 한다. 스탠퍼드 학생쯤 되면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유능하니 감사만 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과 매일 경쟁해야 하는 선천적 욕심쟁이 성취주의자가 그럴 리 없다. 스탠퍼드 학생 다수가 불안 증세를 겪고 교내 심리 상담 서비스를 찾는다. 입학 직후 한창 혼란스러울 때 기숙사 선배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스탠퍼드 학생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오리’라는 점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선배는 웃으며 스탠퍼드에는 ‘스탠퍼드 오리 신드롬(stanford duck syndrome)’이 있다고 이야기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