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 고대 국가 수도 평양에 대하여]
위와 같은 기록이 후대의 조작임을 알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당나라 시기의 『당서』상의 기록과 이를 그대로 인용한
【사료52】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 지리」 ‘고구려’ ‘평양성과 장안성’
국내(國內)로 도읍하여 425년이 지나 장수왕(長壽王) 15년(427년)에 평양(平壤)으로 도읍을 옮겼다. 156년이 지나 평원왕(平原王) 28년(586년)에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83년이 지나 보장왕(寶臧王) 27년(668년)에 멸망하였다. 옛 사람들의 기록에 시조 주몽왕(朱蒙王)으로부터 보장왕(寶臧王)에 이르기까지의 역년(歷年)은 틀림이 없고 상세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혹은 이르기를 “고국원왕(故國原王) 13년(343년)에 (왕이) 평양 동황성(東黃城)으로 이거하였는데, 성은 지금[고려] 서경(西京)의 동쪽 목멱산(木覓山) 가운데 있다”라 하니, 옳고 틀림을 알 수 없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그리고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어찌 이를 알 수 있는가?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한(漢)의 낙랑군(樂浪郡)으로 산굽이를 따라 외성을 둘렀고, 남으로 패수(浿水)가 근처에 있다.”라 하였으며, 또한 《지(志)》에서 이르기를 “등주(登州)서 동북으로 바닷길을 가서, 남으로 해안에 연하여, 패강(浿江) 입구의 초도(椒島)를 지나면, 신라의 서북에 닿을 수 있다.”라 하였다. 또한 수양제(隋煬帝)의 동방 정벌 조서에서 이르기를 “창해(滄海) 방면 군대는 선박이 천 리에 달하는데, 높직한 돛은 번개같이 나아가고, 커다란 군함은 구름처럼 날아 패강(浿江)을 횡단하여 멀리 평양(平壤)에 이르렀다.”라 하였으니,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써 지금[고려]의 대동강(大同江)이 패수(浿水)인 것은 명백하며, 곧 서경(西京)이 평양(平壤)이었던 것 또한 가히 알 수 있다. 《당서(唐書)》에서 이르기를 “평양성(平壤城)은 또 장안(長安)이라고 불렀다.”라 하였고, 그리고 고기(古記)에서 이르기를 “평양(平壤)으로부터 장안(長安)으로 옮겼다”라 하였으니, 곧 두 성이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는지 가까웠는지에 대해서는 곧 알 수가 없다.
【사료180】 『삼국유사』 제1 기이(紀異第一) 고조선(古朝鮮) 왕검조선(王儉朝鮮)
『위서(魏書)』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지금부터 2천여 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어서, 아사달(阿斯達)[『산해경(山海經)』에서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하였고 또 백악(白岳)이라고도 하였는데 백주(白州)에 있다. 혹은 개성(開城) 동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백악궁(白岳宮)이 이것이다.]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를 열어 조선이라 하였으니, 바로 중국 요(堯)임금과 같은 시기였다.”
『단군고기(檀君古記)』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옛날 환인(桓因)[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 환웅(桓雄)이 있었는데, 종종 하늘 아래 세상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었다. 아버지가 자식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伯)을 내려다보니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하였다. 그래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고 내려가서 인간 세상을 다스리게 하였다. 왕검은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년[요임금의 즉위 원년은 무진년(기원전 2333)이므로 50년은 정사년이지 경인년이 아니다. 아마도 사실이 아닌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지금의 서경(西京)이다.]에 도읍하고 비로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후 백악산(白岳山) 아사달(阿斯達)로 도읍을 옮겼다. 이곳을 궁홀산(弓忽山)[방홀산(方忽山)으로 된 것도 있다.]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150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왕위에 오른 기묘년에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 그래서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었으니, 나이가 1908세였다.”
당(唐)나라 「배구전(裵矩傳)」에는 이러한 말이 있다.
“고려(高麗)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지금의 해주(海州)이다.]이었는데 주(周)나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다. 한(漢)나라는 이를 나누어서 3군을 설치하고 현도(玄?)·낙랑(樂浪)·대방(帶方)[북대방(北帶方)이다.]이라 불렀다.”
『통전(通典)』도 이 말과 같다.[『한서(漢書)』에는 진번(眞番)·임둔(臨屯)·낙랑·현도의 4군이라 하였는데, 지금 3군이라 하고 또 이름도 다르니 어째서일까?]
우리나라 기록들이 분명히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지 않다. 비록 왜곡되어 하북성에서 요령성 요양으로 옮기었지만 적어도 한반도는 아니다. 물론 이 기록을 주류 강단 사학계는 왜곡 해석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하고 있지만 당시 서경 및 여기에 있었던 대동강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닌 요령성 요양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은
【사료480】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권, 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2번째 기사 1392년 (임신)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고, 기자(箕子)는 처음으로 교화(敎化)를 일으킨 임금이오니, 평양부(平壤府)로 하여금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사료481】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 10월 9일 기축 1번째기사 1407년 (정해)
평양(平壤)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가 도읍을 세운 뒤로 서북지방(西北地方)의 본영(本營)이 되었고, 또 토관(土官)을 설치하고 ‘서도(西都)’라 이름 하여,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습니다.
【사료482】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6월 6일 기미 2번째기사 1412년 (임진)
예조에서 계청(啓請)하기를, “춘추(春秋)로 사신을 보내어 단군(檀君)·기자(箕子)의 묘에 제사드리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료483】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29권, 세종 7년 9월 25일 신유 4번째기사 1425년 (을사)
(평양)기자 사당에 기자와 단군을 같이 모시는데 단군 사당을 별도로 세우고 신위를 남향하여 제사하게 하다.
【사료484】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5권, 세종 9년 3월 13일 신축 1번째기사 1427년
정사를 보았다. 예조 판서 신상(申商)이 계하기를, “삼국(三國)의 시조(始祖)의 묘(廟)를 세우는데 마땅히 그 도읍한 데에 세울 것이니, 신라는 경주(慶州)이겠고, 백제는 전주(全州)이겠으나, 고구려는 그 도읍한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고해 보면 알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비록 도읍한 데에 세우지는 못하더라도 각기 그 나라에 세운다면 될 것이다.” 하였다.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사료485】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1일 병자 3번째기사 1427년
예조에 전지하기를, “단군(檀君)과 기자(箕子)의 묘제(廟制)를 다시 의논하고,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게 묘를 세워 치제(致祭)하는 일을 모두 고제(古制)에 상고하여 상세하게 정하여 아뢰라.” 하였다.
【사료486】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0권, 세종 10년 6월 14일 을미 5번째기사 1428년
유관이 단군이 도읍한 곳을 찾아내어 의혹을 없애주기를 상서하여 청하다 하니, 보류(保留)하여 두라고 명하였다.
【사료487】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4권, 세종 11년 5월 7일 임자 4번째기사 1429년
호조에서 충청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거하여 계하기를, “이제 하교(下敎)를 받자와 백제 시조(始祖)의 묘우(廟宇)를 이미 직산현(稷山縣)에 세웠으니, 청하건대 평양부(平壤府)의 기자전(箕子殿)에 따라 본 고을의 노비(奴婢) 각 2인을 정하여 이를 지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료488】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45권, 세종 11년 7월 4일 무신 6번째기사 1429년
예조에서 아뢰기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시조(始祖)에 대해서는 이미 사당을 세웠으니, 청하건대 사전(祀典)에 기재(記載)하고 치제(致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료489】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51권, 세종 13년 1월 10일 을해 5번째기사 1431년
호조에서 아뢰기를, “충청도의 백제(百濟) 시조(始祖)와, 경상도의 신라(新羅) 시조(始祖)와, 평안도의 고구려(高句麗) 시조(始祖)의 제전(祭田)을 각기 2결(結)씩 급여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그대로 따랐다.
【사료490】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75권, 세종 18년 12월 26일 정해 4번째기사 1436년
전 판한성부사 유사눌이 단군의 사당을 평양에 건립하는 것이 그릇되었음을 아뢰다.
고려시대에 평양에 설치하였다는 기자사당을 조선시대의 영역인 지금의 압록강 북쪽에서부터 그 이남 및 지금의 평양에서 찾지를 못한다. 특히 조선 세종 시에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상에 삼국의 시조 묘를 세움에 있어 고구려의 도읍지를 알지 못한다고 예조판서 신상이 고하자 세종은 비록 도읍한 곳에 세우지 못하더라도 그 나라에 세우면 된다고 하였으니 조선시대 세종 때까지도 고구려의 수도가 평양이라는 인식이 없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기자사당을 세운 평양이 한반도 평양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히 입증해 준다.
한반도 평양은 고조선이나 고구려 평양성이었던 사실이 없다. 고려시대 기자 도입과 조선시대 이후 지리지상의 기록 이후에 비정되었다. 중국사서와 『삼국사기』는 적어도 요령성 요양으로 왜곡하였다.
하지만 단종 2년, 1454년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평양부조’를 보면 고려로부터 내려온 삼조선설을 계승하는 한편 지금의 평양이 단군이 도읍한 평양이고 여기에 기자가 동래하여 기자조선을 세우고 후에 위만이 여기에 왕험성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사서인 『한서』를 인용하여 현토와 낙랑이 기자를 봉한 곳이라고 하였고, 『당서』를 인용하는 등 장수왕의 평양 천도지가 당시의 평양(부)인 것으로 기록하여 모든 중국사서상의 평양 기록을 드디어 당시 평양에 비정하였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