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GB의 방첩 담당 부서 K부에서 이것은 일상적인 도청 작업이었다.
---「첫 문장」중에서
단단한 운동선수 같은 몸집의 고르디옙스키는 북적거리는 공항에서 자신 있게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는 미약한 두려움이 부글거렸다. KGB 베테랑이며 소련의 충실한 비밀 요원인 올레크 고르디옙스키가 사실은 영국의 스파이였기 때문이다.
--- p.16
올레크 고르디옙스키의 인생은 KGB 그 자체였다. KGB가 그를 형성하고, 사랑하고, 비틀고, 망가뜨리고, 나중에는 거의 죽일 뻔했다.
--- p.23
모스크바로 돌아온 그에게 1962년 7월 31일부터 KGB로 출근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이미 의문을 품기 시작했으면서 왜 그 이데올로기를 집행하는 기관에 들어갔을까? KGB 일은 해외여행의 가능성을 약속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비밀은 사람을 유혹하는 법이다.
--- p.37
여기서 올레크는 다른 훈련생 120명과 함께 소련 첩보 활동의 가장 깊은 비밀을 배웠다. 첩보와 방첩, 첩자 포섭과 활용, 합법 스파이와 불법 스파이, 첩자와 이중 첩자, 무기, 비무장 격투와 감시, 이 기묘한 직업의 불가해한 기술과 언어 등이었다.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감시 감지와 회피는 KGB 용어로 프로베르카, 즉 〈드라이클리닝〉이라고 불렸다.
--- p.39
스칸디나비아의 KGB 불법 스파이망은 치밀하지 않았다. 올레크의 업무 중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버려진 편지함에 돈이나 메시지 남기기, 신호 장소 감시하기, 비밀 스파이들과 은밀한 접촉 유지하기 등 행정적인 일이었다. 비밀 스파이 중 대부분은 그가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난 적도 없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 p.51
직업적인 면에서 올레크는 KGB의 사다리를 타고 매끈하게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말이 아니었다. 모스크바에서 2년을 보내면서 공산 정권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더욱 심해졌고, 덴마크로 돌아온 뒤에는 소련의 속물근성, 부패, 위선에 대한 절망이 깊어졌다.
--- p.80
첩보 세계의 가장 오래된 책략 중에 〈미끼〉가 있다. 한쪽이 상대편의 누군가를 노리고 다가가 그를 꾀어서 공범으로 만들고 신뢰를 얻은 뒤 그의 정체를 폭로해 버리는 책략이다.
--- p.91
상대방의 말이 거짓인지 시험하는 최고의 방법은 이쪽이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을 던져 보는 것이다.
--- p.114
소련은 사실상 거대한 교도소였다.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 안에 2억 8천만 명이 넘는 국민이 갇혀 있고, 100만 명이 넘는 KGB 요원들과 정보원들은 간수였다. 국민들은 항상 감시받았으며, 특히 KGB는 소련 사회의 어떤 부문, 어떤 기관보다도 면밀한 감시의 대상이었다. KGB의 내부 감찰 담당 부서인 제7부의 직원들은 모스크바에만 약 1천5백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 p.144
상사에게 기름칠을 할 때 문제점은 상사가 새로운 사람으로 바뀔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기름이 아주 많이 낭비되는 셈이었다.
--- p.168
의심증은 선전, 무지, 비밀주의, 두려움에서 태어난다. 1982년 KGB 런던 지부는 지구상에서 가장 의심증이 깊은 곳 중 하나로 심리적 압박과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그런 심리 상태의 기반이 된 것은 대체로 공상일 뿐이었다.
--- p.206
영국과 미국 첩보 기관의 관계는 형제 관계와 조금 비슷하다. 서로 친하지만 경쟁심이 있고, 서로 잘 지내면서도 질투하고, 서로를 응원하면서도 싸움을 벌이기 일쑤라는 점이 그렇다. 영국과 미국은 모두 과거에 공산주의자가 고위직에 침투한 사건을 겪었으며, 서로 상대를 다 믿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의심을 계속 품고 있었다.
--- p.233
세상을 바꿔 놓은 스파이들의 전당에는 소수의 선별된 사람들만 들어가 있다. 그 사람 중 한 명이 올레크 고르디옙스키다. 그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KGB의 내부를 열어젖혀, 소련 정보기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그리고 하지 않는지)뿐만 아니라 크렘린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계획을 꾸미는지까지 보여 주었다.
--- p.287
아파트로 돌아온 뒤 고르디옙스키는 낮에 있었던 일을 해석해 보았다. KGB는 자비를 베푸는 취미가 없었다. 그들이 진실을 손톱만큼만 안다 해도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하지만 그가 아직 루뱐카 지하실로 끌려가지 않은 것을 보면, 조사관들이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음이 분명했다.
--- p.365
고르디옙스키는 10여 년 동안 이중생활을 했다. 국가에 헌신하는 직업 정보 요원이면서 다른 편에게도 비밀리에 충성하는 생활이었다. 이런 생활을 해내는 솜씨도 아주 좋았다.
--- p.480
서방의 정보기관들에게 고르디옙스키의 사례는 스파이를 포섭해서 관리하는 법, 정보를 이용해서 국제 관계를 향상시키는 법, 그리고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위험에 처한 스파이를 구하는 법을 보여 주는 교과서적인 예가 되었다.
--- p.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