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할머니는 미국으로 이민 가서 먹고살고 하느라 10년 동안은 모국에 방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 나기 전 월남한 강 할머니 가족은 이후 월남한 고향사람들을 집에 들여 함께 지냈다. 그중에 강 할머니의 6촌오빠가 있었다. 전쟁이 터졌을 때 6촌오빠는 먼저 남쪽으로 내려갔고, 그 이후 한번 어느 시외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난 뒤 소식이 끊어졌다. 바삐 사느라 더이상 연락 없이 지내다 보는 서로 소식 없이 살았다. 이민 가 사는 동안 함경남도 미주도민회를 통해 그 오빠가 대구에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빠를 만날 겸 모국을 방문한 것이 10년 전이었고, 그로부터 5년 뒤 오빠의 임종을 보려고 또 한번 귀국했다.
“오빠하고 같이 왔으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래 말이라예. 성질이 급해도 그래 급한 사람 첨 봤어예.”
10년 전에 만났을 때, 다음에 꼭 함께 찾아가보자고 약속한 그 집을 오빠의 부인인 최 할머니와 함께 찾으러 가는 거였다. 강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도 못하고 일찍 간 남편을 최 할머니가 잠시 혀를 끌끌 차며 아쉬워했다.
“그래도 일 하나는 똑 부러지게 했지예. 내 스물두 살 때 광복동에서 첨 만났을 때부터 그랬으예.”
---「강금순의 우리들의 끝없는 이야기」중에서
세탁소 일은 노동집약적이고 전근대적인 일이기는 하지만 때 묻은 빨래를 깨끗이 빨아서 풀을 먹여 다림질해 새 옷들이 되었을 때 보람 같은 것도 있었다. 한국의 친지들은 미국에 가서 좀 더 근사한 일을 하지 왜 세탁소를 하느냐고 묻기도 한다. 미국 사회에서 자기 비즈니스를 한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해본 사람은 안다. 세탁 과정은 완전 자동시스템이지만 기계고장, 안전장치 장애, 고객들의 일방적인 주장에 부딪히면 그들은 더이상 아름다운 이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겉으로는 웃으며 친절하지만 돌아서서 고발하는, 한마디로 정나미 떨어지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이 일을 벌써 7년째 해오고 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언제나 처리해 왔다. 손에 잡힌 일이니 마음 내키면 내키는 대로 언제까지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 며칠째 거금을 들여 들여놓은 세탁기가 말썽을 일으키는 바람에 세탁소에 대한 권태감이 한꺼번에 덮쳐왔다. 세탁소를 잠시라도 떠나고 싶은 다급한 마음과 시어머니의 병환은 별개의 문제였지만 따질 게 못되었다. 지난해 여름방학 때 일을 봐주던 유학생 부부에게 가게 열쇠를 맡겼다.
---「김수자의 흥국사 그때 이후」중에서
욕실 창밖엔 아직도 추적추적 깊은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찬비가 내 가슴에 떨어지고 있는 듯 한기가 들었다. 나는 바깥에서 비를 맞았을 때보다 집안에 들어와 더 추위를 느낀다. 정수리에다 더운물을 끼얹으면서도 내가 추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밀어내는 것 같던 아내의 눈길 때문일 것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놓으면서도 한마디 말없이 시종 내게서 떼지 않던 그 차가운 눈길, ‘기껏 그 꼴이야?’라는 것 같던 무언의 힐난, 나는 그 모습에서 아내가 어쩌면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오랜 실직으로 내가 실직 그 자체에 무감각해졌다고 여길 수도 있는 아내 나름의 두려움. 그것은 뿌리 없이 떠도는 생활에 익숙해져 마음의 긴장도 의욕도 없이 무관심과 나태 속에다 방치한 채 되는 대로 살아간다고 여긴, 나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었다. 그것은 실은 내가 가장 경계하고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내가 땅속에서의 일을 선택한 것도 어쩌면 그럴 수 있는 나에 대한 경고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김외숙의 겨울비」중에서
닥터 백은 일흔이 넘은 나이셨지만 무척 건강하셨는데 잔병 정도는 있어도 큰 병은 없으셨다. 일반적으로 그 나이가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데 닥터 백은 삼십 분 넘게 자전거를 달려 수술 시간에 늦지 않게 오시는 것을 보면 참 건강하신 편이다. 그것도 수술 받으러 오시는 것이 아니라 수술하러 오시니까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내 치과 병원은 규모가 작아서 나 혼자 충분히 운영할 수 있지만 한 달에 한두 번 있는 잇몸 수술 때는 도움이 필요했다. 나는 그때마다 닥터 백에게 연락했고, 그분은 한 번도 거절하시지 않고 꼭 와 주셨다. 아무리 봐도 훌륭한 치과 의사셨는데 닥터 백은 이상하리만큼 세상과 동떨어져 살고 계셨다. 자동차가 없어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고 생활은 전적으로 국가에서 나오는 얼마 되지 않은 은퇴연금에 의존하셨다. 가욋돈이라면 내 수술을 도와주시면서 조금씩 버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인지 내게 자주 돈을 빌려 가곤 하셨는데 나는 돈을 꾸어드리면서도 항상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왜냐면 그 액수가 20불, 10불, 심지어는 단돈 5달러일 때도 이따금 있기 때문이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어른이, 그것도 소위 의사라는 분이 그 정도 돈이 없어서 남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이 나를 속상하게 했다. 물론 내가 사례비를 드리면 바로 갚기는 하셨지만 은퇴한 의사의 생활이라고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족도 없고, 친구도 없고, 재산도 없고, 가진 것이라고는 자존심뿐이었다. 남들은 모두 스마트 폰을 쓰는데 닥터 백은 여전히 접었다 폈다 하는 구식 휴대전화를 사용하셨다. 혹시 도박으로 전 재산을 다 없애셨나 의심도 해봤지만, 노름할 위인도 못 되셨다. 그저 돈과 관계없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박종진의 달의 비밀」중에서
대청마루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숯불다리미로 홑이불 네 귀퉁이를 마주잡고 휘적휘적 다림질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물 한 모금을 입에 물고 푸우 하고 펼쳐진 옥양목 천 위에 물안개를 뿜으면 할머니가 얼른 그 위로 바알간 숯불이 담긴 다리미로 왔다리갔다리 쓱쓱 문질러대곤 했다. 쭈글쭈글하던 홑이불 천이 마치 마술사의 손을 거친 듯 팽팽하게 펴지면 어머니는 재빠르게 그 부분을 잡아당겨 채곡채곡 접곤 했다. 그럴 때면 할머니는 항상 느릿느릿 ‘나비야 청산가자’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누이와 나는 그 대청마루 한쪽 편에서 이리저리 뒹굴며 됫박에 담긴 옥수수와 쌀 튀김을 먹다가 심심해지면 문득 약속이나 한 듯 드넓은 마당으로 뒤쳐나갔다. 그리곤 숨바꼭질을 하거나 아니면 사방 네모로 금을 긋고 귀퉁이에 손 뼘을 돌려 쥘부채 모양의 본집을 짓고는 땅 따먹기 놀이를 시작하곤 했다. 사금파리를 동그랗게 갈은 도구나 납작한 바둑알 또는 사이다 병뚜껑으로 본집 귀퉁이로부터 두 번 혹은 세 번씩 퉁겨 다시 자기 본집 영역으로 들어오면 그만큼 자기 땅이 넓어지는 놀이였다. 누이와 나는 아주 열심히 땅거미가 질 때까지 조금이라도 내 땅을 넓히느라 티격태격 싸움도 많이 하곤 했다. 내 사금파리 도구가 금에 물렸다거니 아니라니 서로 시비를 할라치면 어느 틈엔지 어머니가 다가와 심판을 서주곤 했다.
---「손용상의 해구설화」중에서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신종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세상에 처음 알려진 지 3개월 만에 WHO에서 전 세계 팬더믹 선언을 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속도로 번져갔다.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정부도 임시로 학교를 닫고 지정된 필수업종 외에는 재택을 하라는 셧다운 명령이 떨어졌다. 토론토에서 한참 떨어진 중소도시에 살고 있는 미영은 곧 시작되는 임시 셧다운에 앞서 장을 보아야 했다. 이미 여기저기서 마트의 휴지가 동이 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있었지만, 직장 때문에 미리 장을 볼 수가 없었다. 집에 두루마리 휴지 여분이 몇 개 있기는 한데, 문제는 만약 지금의 셧다운이 한 달 이상 지속 된다면 결국 휴지를 사러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어렵사리 시간을 낸 미영도 일단 화장실용 휴지를 사야겠다는 생각에 대형 할인매장에 갔지만, 역시 두루마리 휴지는 매진 상태였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아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카트를 밀고 다니면서 바쁘게 물건을 주워 담고 있었다. 카트마다 꽉꽉 채워진 물건들 사이로 예외 없이 휴지류들이 들어차 있었다. 정말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아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던 키친타월도 눈앞에서 금방금방 비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걸 보고 미영 역시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저도 모르게 2박스를 카트에 밀어 넣었다. 아직 집에 재고가 충분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1인당 2개로 구매 제한이 있다는 빨간 글씨의 경고문도 그제야 봤다. 쉴 틈 없이 부딪히는 카트들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공포영화 속 넋 나간 주인공의 주변 소음 같았다. 두근두근 두려움이 밀려드는 사재기 행렬이었다. 게다가 창고형 대형마트 특유의 장식 없는 투박한 진열과 높은 천장에서 희미하게 내려오는 불빛도 회색빛 벽과 함께 분위기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고 있었다. 미영의 가슴도 함께 쿵쾅거리고 귀가 멍멍해지면서 발걸음이 빨라졌다.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은 어수선함 속에서도 이 행렬에서 낙오해서는 안 된다는 굳은 결의가 함께 솟았다. 머릿속에선 쉴 새 없이 무엇을 집어 담아야 하는지 계산하며, 눈으로는 다른 사람들의 카트를 훔쳐보았다.
---「신순호의 그해 봄」중에서
날씨가 찌뿌드드하고 안개가 껴서 쌀쌀한 편이다. 안개는 바다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는다. 글로리아호는 안개 속을 온종일 항해하며 뱃고동을 5분 간격으로 울어댄다. 10 놋트의 속력으로 꼬박 낮과 밤을 가야 한다. 린다가 그랬듯이 나도 하는 일 없이 침대에 누워 있고 싶다. 점심도 거르고, 룸메이의 청소도 거절하고 누운 채로 바다만 바라본다. 배는 속력이 느리다. 느릿느릿 헤엄치는 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다. 나도 느리게 살고 싶다. 느리게 늙고 싶다.
오후에 그림 경매가 있다면서 아내 제시카는 나를 앞세워 같이 가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모처럼 귀하디귀한 기회, 게으름의 행복을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았다. 못 들은 척 창밖으로 바다만 바라보았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로 보아 혼자서 간 모양이다.
그림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아름답다. 그림을 그린 화가가 아름다운 생각에 젖어 그렸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화가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 내게도 아름답게 보인다. 평생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화가, 그의 눈을 통해서 보는 아름다움, 그런 아름다움을 우리는 거저 본다. 내게는 거저 얻어지는 아름다움이다.
---「신재동의 크루즈 여행」중에서
마이크네 집은 네 식구로서 환갑을 넘긴 아버지와 동갑내기 어머니는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사거리 코너에서 본인 소유 건물에 규모가 큰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었으나 아버지는 명목상 사장님일 뿐, 사업 전반에 걸쳐 수완을 보이고 있는 물불가리지 않는 성격의 어머니 순자 씨, 그리고 하나 있는 여동생 수잔은 언제 졸업하려는지 벌써 수년째 시내에 있는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그에 비해서 멜로디네 집은 식구가 단출했다. 몇해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된 마이크 엄마와 비슷한 연배인 멜로디 어머니 정희 씨는 멜로디 하나만을 금쪽같이 키우며 동포가 운영 중인 일식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어쩌다 한번 가뭄에 콩나듯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 이여근의 갈림길」중에서
이메일이 왔다. ‘suspicion of developing pneumonia’ 폐렴으로 발전될 의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 몇 번 기침을 했고 딸아이가 전화로 병원에 한번 가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근데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까지 폐렴으로 발전되도록 증상이 없었지? 이상하네.’ 발전이니 의심이니 하는 단어보다도 백배나 크게 느껴지는 ‘폐렴’이란 단어가 주는 공포감으로 기숙은 잠시 얼어붙은 듯 꼼짝도 못하고 앉아 있었다. 일단 숨을 고르고 주치의에게 전화를 하니 마침 예약한 사람이 캔슬되었다고 지금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한다. 주치의는 담배를 피우냐는 질문으로 시작해서 숨을 쉬어보라, 기침은 그동안 없었냐, 열은 없었냐, 남편은 왜 돌아가셨나, 집안에 혹시 폐가 나쁜 사람이 있냐, 정말 별의별 것을 다 물어봤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시기가 시기니만큼 펜데믹 중에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죽은 사람의 구십 프로는 결국 폐렴이라고 하니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엑스레이를 다시 찍어보라는 주치의의 오더로 방사선과에 전화를 거니 내일 모레는 주말이라 월요일이 가장 빠른 시간이라고 한다.
---「정은실의 48시간의 길이」중에서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날마다 준과 프랑카는 연구실과 도서관에서 서로만을 바라보는 소우주 속에서 살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5년간에 싹트고 자란 촉촉한 사랑은 진지한 것이었다. 붕괴될 수 없는 어떤 저력이 두 지성을 깊은 신뢰로 묶고 있었다. 어렴풋한 그리움이 아니라 뜨거운 심장이 서로를 갈망했다. 국적과 인종의 벽을 넘어선 끌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맺어진다는 현실적 문제는 암담했다. 오직 아들 하나, 땀으로 뒷바라지한 준의 부모님은 아들이 박사가 되어 돌아온다는 기쁨에 깊이 빠져 있다가 준이 흑인 여자를 거론하자 그만 소식을 끊어 버렸다. 프랑카의 입장 또한 난감했다. 조국 발전에 기여해 줄 것을 믿었던 딸이 머나먼 극동, 한국인 신랑감을 거론하다니. 집안이 발칵 뒤집혀졌음은 당연 이상의 당연이었다. 얼마 동안의 침묵 과정이 지난 후 프랑카 부모는 엄중한 조건을 선포했다. 동양인과 결혼하여 미국에서 사는 것은 절대 불가, 한국에 가는 것은 더더욱 불가, 단 그 사람과 케냐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케냐를 위해 일을 한다면 가능하다는 조건이었다. 준의 부모님께 프랑카 측의 의견을 전했다. 공학박사 신랑감이라 하여 깜짝 놀랄 만한 집안으로부터 중매가 줄을 서는데 이름도 모르는 나라 케냐로 아들을 보낸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었다.
---「주숙녀의 폭풍이 남기고 간 자리」중에서
한 아파트에 사는 우리 모두는, 잠시겠지만, 서로 예의발라지고 그만큼 서로 멀어졌다. 우주의 성간이 멀어지듯이 그렇게. 그리고 묘하게도, 거품이 걷힌 그런 생태가 오히려 좀 더 본질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예외가 있다면 우리 두 H.K.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는 함께, 은근히, 정중하게, 따돌림을 받는 입장이 됐다. 화가는 또다시 ‘미’의 세계 속으로 침잠했고, 애미는 새 애인에 열중해 밖으로 나돌고, 중국유학생은 나인지 량인지에게 화가 나 있으면서 #3A과는 잘 지내는 것 같았다. ‘메드베데브’인지 ‘메드베디’인지 부부, 혹은 행세부부는 여전히 싸우면서도 여전히 음식 냄새를 사방에 풍겼고, 매니저 할머니는 좀 의기소침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할 일, 할 말 다 했다. 이런 저런 사정을 모르는 1층 아가씨는 소신대로 화려하고 소신껏 안하무인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량과 내가 동아리가 지어질 수밖에. 이래저래 우리는 이따금 얘기를 나누며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것마저 없었다면 그 건물 안의 우리 모두는 서로 너무도 정중하게 멀어져서, 각자의 방에서 각각의 우주를 돌릴 판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그가 한 건물 안에 있어 다행스럽고, 결국 서로의 존재가 존재 자체로 고마워진 셈이었다.
---「한영국의 허리케인 아파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