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의 “그리스도 신화”는 자유주의자들의 제거 작업에서처럼 배제되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교적 자기 이해를 위하여 소위 “실존적 해석”의 도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실존적 해석은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이고 긍정적인 단언이나 바오로가 1코린 15장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신앙의 수용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순수한 자기 이해이고, 그래서 객관적으로 수용되는 신앙 내용으로 소급되지 않는 순수한 신앙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을 토대로, “역사의 예수” 문제가 “신학”으로부터 배제되고 신학은 자기 자신을 토대로 서 있게 된다.
--- p.71, 「제1장 성경에서 교부들까지」 중에서
사도 교부들의 시대에 신약 성경 전체뿐만 아니라 특별히 공관 복음서도 규범적인 성격을 지니지 못했다. 이들은 정경이 형성되는 2세기를 지나면서 규범적인 성격을 얻었다. 사도 교부들이 공관 복음서를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관련된 더 치밀한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공관의 세 복음서는 그 자체로 공관 복음서의 문장을 인용하는 출처로서 매우 부수적인 역할만을 수행한다.”
--- p.275, 「제2장 2세기의 그리스도론」 중에서
호교 교부들에게서 시작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를 통해 발전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론적으로 토대가 되는 전승의 진술들에 대한 해석은 의심의 여지없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일단 이러한 영향을 밝혀내는 것은 쉽지 않다. 오리게네스의 죽음과(253/254년) 니케아 공의회(325년)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 기간에 교부들의 지도 위에는 수많은 공백들이 나타난다. 오리게네스를 기준으로 삼을 때 이중적인 관점에서 문제의 이동과 첨예화가 나타난다.
--- p.515, 「제3장 4세기의 그리스도론을 향한 여정」 중에서
그리스도는 결코 과거 속에서 철저히 규명되지 못했다. 성부의 업적으로 인해 영광스럽게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자신을 영원한 현재 가운데 계시게 되었다. 이는 그분으로 하여금 당신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과 우정을 맺었던 그 깊은 친밀함으로 모든 사람과 함께 관계를 맺게 해 준다.
--- p.361, 「제4장 교부 시대. 그리스도론적 공의회들 중에서」 중에서
제1천년기 전반부 동안 교회의 창조성은 성경에 대한 수용과 이해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헬레니즘 문화, 라틴 문화와의 대화 그리고 선사받은 진리에 대한 숙고와 삶을 통한 동화(同化) 과정에서 잘 드러났다. 반면, 제1천년기 후반부는 그와 관련된 풍부한 직관과 연구에 대한 전수, 체계화에 의해 지배적으로 특징지어졌다. 다마스쿠스의 요한(+749)은 동방을 위해 이런 역할을 수행했으며, 서방에서는 보에티우스(+524), 루스페의 풀겐티우스(+532), 카시오도루스(+580), 대 그레고리우스 교황(+604), 세비야의 이시도루스(+636), 베다 존자(+735)와 같은 탁월한 인물들을 통해 이 작업이 이루어졌다.
--- p.560, 「제5장 중세: 스콜라와 종교 개혁의 세기 중에서」 중에서
아리우스주의의 시대와 같은 것이 다시 한번 야기되는 계기가 결코 제공되지 않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 본질을 둘러싼 투쟁 시기의 귀환을 막기 위해 니케아 신경을 확장하는 일체의 시도도 이루어지지 않았어야 했다. 니케아 신경은 모든 중요한 문제들을 풀기에 충분했다는 것이다.
--- p.887, 「제2절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 존재에 대한 새로운 신학적 숙고」 중에서
그리스도론의 새로운 시대는 우선 네스토리우스와 키릴루스라는 두 신학자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네스토리우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로(428-431년) 자신의 도시에서 마리아의 테오토코스 칭호를 둘러싸고 일어난 논쟁에 개입했다. 그는 빠르게 신학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그의 지지자들은 비잔틴 제국과의 결합으로부터 밀려난다. 451년 이후 키릴루스 지지자들과 칼케돈 지지자들만이 발언하고 서로 논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대화에, 전통을 견지하고자 했으며 진정한 문제를 간파했던 네스토리우스의 진정한 관심사가 나타났다. 네스토리우스의 새로움은 그가 그전에 어느 누구도 하지 못했던 방법론적으로 올바른 통찰을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 p.1128-1129, 「제3부 케리그마 - 신학 - 교의」 중에서
그리스도론의 더 오래된 역사는 이제 451년 10월 개최된 칼케돈 공의회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책임을 지녔던 이들의 공의회 소집과 개최 의도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 이후 시대를 뒤덮었던 뜨거운 논쟁을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에페소 공의회는 발전의 상황에 비추어 보았을 때 너무나 시기가 늦은 과제, 즉 그리스도 안의 단일성과 차이를 분명히 제시하는 교의적 진술을 마련하는 과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아폴리나리스의 단성론과 에우티케스주의와 네스토리우스주의만이 꾸준히 내적으로 극복될 수 있었다. 하지만 451년의 새로운 공의회 역시 그리스도론에 대한 표현들을 결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그 교의 결정 때문에 이번에는 그리스도교가 분열되었다.
--- p.1319, 「제3절 칼케돈 공의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