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건우 님, 여기 펜과 신청서입니다. 저쪽 테이블에서 신청서 천천히 읽어보시고, 궁금한 점 있으면 저를 다시 불러 주세요.
다음, 39번 고객님!”
전광판에 39라는 숫자가 큼지막하게 뜨며 딩동 소리가 로비에 울려 퍼졌다.
“〈은행원 김명인〉 편으로 예매하겠습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39번이 찍힌 번호표를 내밀었다. 고르게 손질되어 광택이 도는 머리와 손톱이 짧게 정돈된 긴 손가락.
남자는 말끔히 다림질된 회색 정장과 은색 빗살이 새겨진 새틴 재질의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네, 명인 님. 30분 뒤 오후 1시에 영화 관람 괜찮으신가요?”
흰 셔츠 위에 보라색 벨벳 조끼를 껴입은 티켓 부스 직원이 물었다.
“네.”
금박 테두리 장식의 판판한 보라색 티켓 한 장이 발급되었다.
“명인 님, 티켓 확인 도와드리겠습니다. 〈은행원 김명인〉 편으로 오후 1시, D관 G열 9번 자리입니다. 영화 시작 5분 전까지 착석 부탁드리겠습니다.”
“혹시, 영화 상영 전까지 직업 봉안실 관람할 수 있을까요?”
명인은 뒷목을 긁적이며 조심스레 물었다.
“물론이죠. 여기 출입 명부만 작성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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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은 왼손에 쥐고 있던 검은색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겉가죽이 너덜너덜해진 가방의 지퍼를 열자 경비복과 모자, 반창고, 그리고 302호 꼬마로부터 받은 알사탕이 모습을 드러냈다. 명인은 그것들을 이수증 옆에 놓았다. 다시 창을 닫고 오른쪽 터치스크린에서 ‘기대 수명 수정하기’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스크린에 안내 문구가 떴다.
‘기대 수명 기간을 재입력한 후 수정 완료 버튼을 눌러주세요.’ 명인이 3년으로 입력하고 수정 완료 버튼을 누르니, 스크린에 문장 하나가 깜빡였다.
‘수정이 완료되었습니다.’ ‘경비원 김명인_3년’으로 수정된 명패를 확인한 명인이 왼손을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12시 52분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함에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을 겨우 거둬낸 명인은 발걸음을 입구 쪽으로 돌렸다. 빈 공기로 가득 찬 가방을 든 그의 손은 늘어진 어깨만큼이나 축 처져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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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림 지원자, 이게 다예요?”
수많은 낙방 끝에 얻은 첫 번째 면접. 자기소개가 끝을 맺기도 전에 끼어든 질문이었다.
“네?”
“4년 동안 한 게 이거밖에 없어요?”
“어…… 그게…… 동아리에서……” “왜 그랬어요? 이 빈칸 좀 봐! 적어도 활동 이력 세 칸 이상은 채웠어야지. 또래들은 다 열정페이로 뛰고 그러던데. 아니면 우리 회사를 너무 쉽게 본 건가?”
면접자는 3년 전 하림의 학교 강단에 섰던 인물이었다. 당시 그의 강의는 하림에게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문장을 마음 깊이 새기게 했음은 물론, 빠르게 흐르는 한강 물결에 마음이 조급해질 때도 주관적인 속도를 지키겠노라고 다짐하게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만난 그는 하림의 이상을 모질게 재단했다. 결국, 세상은 스스로가 보채지 않으면 도태되는 곳이었다. 그렇게 말랑한 살결이 버티지 못한 하루가 참 오랫동안 뼈를 시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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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린은 정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입구엔 ‘기대 수명 시네마’ 라고 적힌 푸른색 네온사인이 걸려 있었다.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스산한 기운이 감돌 때쯤 세린은 중얼거 렸다.
“나…… 혹시 죽었나?”
세린은 시네마의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이룬 것 하나 없이 잃은 것만 수두룩한 삶이라 입구를 통과하는 내내 발걸음이 가벼웠다.
또각또각. 어디선가 구두와 대리석 바닥 간의 마찰음이 들려왔다. 로비를 서성이던 세린의 시선은 중앙 홀 계단으로 옮겨졌다. 한 남자가 세린을 보고 화들짝 놀라 카운터로 달려왔 다. 구김 하나 없는 흰 셔츠 위로 보라색 벨벳 조끼를 입은 깔끔한 차림이었다. 명찰에는 ‘송마호’라고 적혀 있었다.
“안녕하세요, 손님! 저희 금일 영화 관람 이용 시간은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혹시 잡 예측 서비스 예약으로 오신 걸까요?”
마호가 물었다.
“어……” “아! 손님, 혹시 저희 시네마 이용이 처음이신가요?”
“네! 처음이에요.”
어두웠던 세린의 얼굴에 작은 화색이 돌았다.
“그럼, 명함 먼저 주시겠어요? 저희가 시간대별로 입장 가능한 직업군이 나뉘어 있어서요.”
“명…… 명함이요? 그런 건 없는데…….”
세린은 혹여나 하는 마음으로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봤 지만, 안감만 까끌까끌하게 만져질 뿐이었다.
“네? 그럼, 여기 어떻게 들어오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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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린이 다시 확인해보니 하단엔 직업명과 직업인의 실명 그리고 직업의 기대 수명이 나열되어 있었다. 검은색으로 뒤덮인 세린의 카드 맨 하단부엔 빛이 들어오는 방향에 따라 ‘Underground Rainbow’라는 글자가 보였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땅 밑의 무지개. 세린은 알고 있다. 빛이 차단된 땅 밑에는 무지개 따윈 없다는 것을.
‘기대 수명 0년은 무슨 의미일까.’ 복잡다단한 의문이 점장의 한마디에 정리되었다.
“기대 수명 0년이라……. 이런 경우가 꽤 있긴 하지.”
그는 콧김을 가득 내뿜으며 가느다란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 고시생, 지망생, 취업준비생 중에 이렇게 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어. 물론 이곳이 그런 애들에게 쉽게 허락되는 곳도 아니지만. 우리는 직업의 기대 수명을 봐주고 업의 탄생과 임종을 관할하는 곳이지, 운세나 사주 따위를 봐주는 곳은 아니거든. 너는 배우 지망생이라고 했지?”
“네? 직업의 기대 수명이요?”
“맞아. 아무것도 모르고 온 너 같은 인간은 받아들이기 좀 힘든 개념인데, 직업에도 수명이라는 게 있어. 그 직업을 가진 사람, 소속된 사회, 그리고 트렌드에 따라 직업도 수명이 달라져. 그러니까 넌 지금 죽지 않았어. 아주 멀쩡히 살아있다고. 다만 너의 직업 기대 수명이 0년이라는 것뿐이야.”
“저기요! 하…… 왜 저는 배우로서의 기대 수명이 0년이죠?”
욱하는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뿜어졌다.
“뻔한 걸 왜 물어봐? 재능이 없는데 무턱대고 맞지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으려고 애만 쓰고 있으니까. 물론, 이유는 개개 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무튼 넌 네가 생각한 배우는 될 수없을 거야. 자, 그럼 이제 어느 정도 궁금증도 해결된 것 같고. 그만 가봐, 늦었네.”
---「1 뒤바뀐 배역」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