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체 역사를 조망하면서 문득 세상 사물은 끝에 이르면 돌아온다는 뜻인 ‘물극즉반(物極則反)’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길든 짧든 간에 하나의 왕조는 알찬 포부와 뜨거운 의지로 시작하여 맹렬하게 위로 향한다. 그리고 정점에 이르러 환의에 찬 그 순간 곧바로 쇠하기 시작한다. 저 멀리 끝이 보일 때쯤 등장하는 것이 바로 농민 기의다. 참다, 참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마지막 비수를 꽂는 것으로 바닥을 친다. 비록 농민이 그 과실을 따 먹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다음 신기하게도 다시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렇게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점차 자리를 이동하는 것, 어쩌면 삶의 모습도 그런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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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골타는 생여진 각 부락을 이끌고 본격적으로 대요 투쟁에 나섰다. 그는 먼저 영강주(寧江州)와 출하점[出河店, 길림성 부여현(扶餘縣)]에서 요나라 병사를 크게 무찔렀다. 이에 놀란 요 조정은 급히 증원군을 파견했지만 또다시 여진족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원래 요나라 조정은 여진족의 봉기를 막기 위해 북쪽으로 출하점에서 황룡부, 함주[咸州, 요녕성 개원(開原)]를 거쳐 남쪽으로 동경 요양부(遼陽府)에 이르는 군사 방어선을 설치했는데, 여진족이 봉기에 앞서 방어선을 분쇄하고 말았다. 1115년 아골타가 칭제하고 건원하여 정식으로 금나라를 세웠다. 그해 가을 황룡부를 공격하고 계속해서 내류하[?流河, 지금의 납림하(拉林河)], 함주, 호초욕(好草?) 등 요의 군사 근거지를 공략했다. 여진족은 공략한 지역에서 군사를 훈련시키고 군마를 길러 이로부터 1만여 명의 철기(鐵騎)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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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조 통치 시기에 중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크고 풍요로운 국가였으며, 그 명성이 이미 유럽이나 아시아, 아프리카까지 널리 퍼졌기 때문에 서방 각국에서 사절이나 상인, 여행가, 선교사 등이 끊임없이 왕래했다. 원 세조 시절 베니스 출신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들어와 원조에서 관리를 한 적도 있다. 그가 남긴 여행기는 원조의 광활한 강역과 상공업이 발달한 대도시의 모습을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여 서구인들의 중국문명에 대한 동경을 일으키기도 했다. 중국과 외국의 교통이 빈번해짐에 따라 중국인이 발명한 나침반, 화약, 인쇄술 등이 아랍을 통해 서구에 소개되었으며, 아랍인들의 천문학, 의학, 산학(수학) 지식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기독교의 일파인 야라가온교(也里可溫?)가 중국에 전래된 것도 그 즈음이다. 이슬람을 믿는 신자들과 그들의 사원인 청진사(?眞寺)도 더욱 증가했다. 당시 적지 않은 중국인들이 중앙아시아, 서아시아, 남양 등지로 나갔으며, 중국에서 건조한 대형 선박은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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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군은 “틈왕을 맞이하면 세금을 납부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구호를 내걸고, 가는 곳마다 “전량을 면제하고 5년 동안 징수하지 않는다(?免錢粮, 五年不徵)”라고 선언했으며, 관부나 지주의 곳간을 열어 얻은 식량으로 기민을 구휼했다. 그래서 당시 황하 남북 여러 지역에 다음과 같은 민요가 유행했다.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네. 틈왕만 있으면 마음대로 먹을 수 있고 노역도 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는다네(吃他娘, 穿他娘, 吃着不盡有闖王, 不當差, 不納粮).” “아침에 겨우 1승, 저녁에 겨우 1합. 요즘 가난한 사내 정말 살기 어려워라. 일찌감치 대문 열어 틈왕 맞이하며 모두 기뻐하네(朝求升, 暮求合, 近日貧漢難存活, 早早開門迎}闖王, 管?大小都歡?).” 이러한 민가는 이자성에 대한 당시 농민 대중들의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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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초기 영국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1825년과 1837년에 연이어 경제위기가 도래함에 따라 영국 정부와 자산계급은 중국 침략전쟁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다. 1832년 영국 동인도 회사는 일찍이 간첩선을 파견하여 중국 연해와 항만을 정찰했으며 아울러 중국 침략에 관한 구체적인 건의안을 제출했다.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아편 장사꾼과 런던, 맨체스터, 리버풀의 상인들은 분분히 영국 정부에게 무력을 이용하여 중국시장을 개방하고 아편무역을 보호하라는 요청서를 제출했다. 1840년 2월, 영국 내각은 정식으로 중국 침략전쟁 발동을 결정했다. 4월 영국 국회에서 통과되자 그해 6월 엘리엇 영국 전권 대표가 이끄는 침략군 4000명이 40여 척의 군함을 타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하여 주강(珠江) 입구를 봉쇄했다. 이로써 아편전쟁이 정식으로 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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