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는 『사회적 삶의 에너지』(2004)에서 아예 ‘이타적 권력’의 가능성을 부정한다. “이타적 지도자는 설명하기가 쉽다. 관심과 숭배의 중심에 서는 것은 물론이고 추종자들에게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엄청난 정서적 에너지를 얻는다.” 사람들의 권력 의지나 권력욕을 인정한다고 해서 대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헌신이 폄하되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걸 인정해야 그런 헌신 끝에 권력을 갖게 되더라도 타락할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그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의 권력욕을 ‘신념’으로 포장하거나 착각하면서 권력욕이 없는 것처럼 아예 그걸 지워버리는 일이다.
--- p.23, 「왜 권력욕은 오직 죽어서만 멈추는가?」 중에서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권력을 선하게 쓸 것으로 믿고 지지했던 권력자들마저 ‘권력의 주인’이라기보다는 ‘권력의 노예’가 되는 모습에 절망하기도 한다. 영국 작가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의 말마따나, “권력은 치사한 것이다”. 실제로 권력을 접하거나 상대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그건 바로 “권력이 치사하고 더럽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권력을 갖고 나면, “내가 여기까지 어떻게 해서 왔는데”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부패와 타락의 길로 내달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말이 외쳐지고 있을 게다. 잊지 말자. 부패는 권력의 숙명이라는 것을.
--- p.50~51, 「왜 부패는 권력의 숙명인가?」 중에서
권력은 언제든지 폭력으로 변할 수 있는 잠재적 폭력이라는 점을 잘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정치학자 셸던 월린(Sheldon S. Wolin, 1922~2015)은 “권력의 본질적인 핵심은 폭력이며 권력의 행사는 종종 누군가의 신체나 재산에 폭력을 가하는 것이라는 원초적인 사실”을 무시하면 안 된다고 경고한다. 물론 폭력과는 거리가 먼 권력의 이상을 상상한 이들도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 중의 하나가 미국 정치학자이자 철학자 해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다. 『폭력론』(1970)에서 권력과 폭력을 구분한 아렌트는 “폭력은 언제나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며 “권력과 폭력은 대립적이다. 전자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후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고 했다.
--- p.89~90, 「왜 폭력을 쓰지 않는 권력이 더 강한가?」 중에서
‘제왕적 대통령’은 대통령제 국가의 숙명인가? 관련이 전혀 없진 않겠지만,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열망은 내각제 국가에서도 나타나는 것인바, 그것만으론 다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서민 지도자’? ‘보통 사람’? 사람들은 입으로는 그런 이미지의 지도자를 원한다고 말하지만, 가슴으론 그런 지도자를 원치 않는다. 미국 정치학자 어윈 하그로브(Erwin C. Hargrove)는 대통령이 조언자들에게서 진실을 들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에 대한 ‘과도한 경외(敬畏)’를 파괴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미국인들이 스스로 그렇게 할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대통령 자신도 그걸 원치 않는다. 모든 나라의 지도자가 실제보다 큰 사람인 것처럼 보이기 위한 쇼를 한다.
--- p.161~162, 「왜 대통령은 ‘제왕’이 되었는가?」 중에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는 “겸손은 권력에의 의지를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고, 프랑스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 1864~1910)는 “잘나가는 사람이 겸손하긴 쉽지만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겸손하긴 어렵다”고 했다.326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겸손에 대한 속물적 이해에 따르자면 그렇다. 그런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는 겸손을 실천하자는 것이지만, 스스로 “지역언론은 별 볼 일 없는 언론이기에 겸손하기 어려운 건가?”라고 물어볼 필요는 있겠다. 어차피 ‘권력자 모델’을 흉내만 낼 뿐 제대로 실천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지역과 지역민을 위해 헌신하는 ‘봉사자 모델’과 같은 정반대의 모델에도 눈을 돌려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 p.205~206, 「왜 권력자는 사람을 개미로 볼까?」 중에서
로버트슨은 개코원숭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권력감은 코카인과 같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권력감은 도파민이라는 신경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해 뇌의 중독 중추를 활성화한다는 것이다. 집단의 하위에 있는 개코원숭이는 지위가 올라갈수록 도파민 분비량이 늘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공격적이고 자신감이 넘치는 쪽으로 변모했다는 것이다. 로버트슨은 “권력이 강할수록 도파민이 많이 분비되고 자신의 정당성을 의심하지 않는 성격이 된다”며 “절대 권력의 속성을 생물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버트슨은 “권력은 매우 파워풀한 약물이다(Power is a very powerful drug)”며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뀐다”고 말한다.
--- p.260~261, 「왜 권력을 쥐면 사람의 뇌가 바뀌는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