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의 르네상스인들은 단테와 페트라르카 그리고 보카치오를 이탈리아 문학계의 ‘3대 왕관tre corone’으로 일컬으며, 그들의 문학적 위상에 관한 크고 작은 논쟁을 벌이곤 했다. (중략)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비교의 핵심이었다. 단테는 일찍부터 현실정치에 뛰어든 능동적인 시민의 전형이었고, 결국 정쟁에 휘말려 고국에서 추방되어 망명객으로 삶을 마감한 불운한 천재였다. 이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마치 세파에 초연한 듯 파도바, 아비뇽, 밀라노 등의 여러 도시를 제 집처럼 오가며 ‘세계시민’의 삶을 추구한 방랑 지식인이었다. (중략) 한마디로 그[보카치오]에게 단테는 모방할 만한 근대 작가의 본보기였다. 하지만 이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단테에게 의도적인 냉담이나 무관심 이상을 표출하지 않았다. 단테가 “선술집이나 저잣거리의 무지한 이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저속한 언어를 구사한 통속 작가에 지나지 않고, 그렇기에 그의 책들은 한낱 “생선 가게의 포장지”로나 쓰일 수 있을 뿐이라고 냉소할 정도였다.
--- p.32~35
르네상스기의 지식인들은 고전고대의 부활을 염원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책이라는 타임캡슐의 도움 없이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고상한 꿈에 불과했다. 이를 고려하면 빛바랜 고서들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들을 어둠 속에서 구출했으며, 또 모두가 이용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니콜리는 분명 르네상스의 이상을 가장 충실하게 실천한 초기 르네상스의 주인공이었다. 르네상스가 다른 무엇보다 책과 함께 시작했고 고전이라는 책을 중심으로 전개된 글과 말의 향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우리는 분명 르네상스 지성의 역사에서 니콜리를 빼놓을 수 없다.
--- p.85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은 흔히 ‘자유교양학문liberal studies’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교과를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능동적인 시민을 기르려고 했다. 살루타티가 환호했듯이 베르제리오는 이런 휴머니즘 교육의 이상을 명확한 논고의 형식으로 제시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사회적 유용성에서 교육의 가치가 구해져야 하며, 따라서 교육과 학문의 목적이 그저 개인적인 즐거움을 누리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 p.106~107
15세기에 명멸해간 수많은 지성 가운데 데쳄브리오는 남다른 영욕의 부침을 겪은 흥미로운 인물이다. 무엇보다 그는 120권이 넘는 다양한 저작을 집필하고 번역한 당대 최고의 다산적인 저술가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그는 거의 르네상스기 최초로 플라톤의 『국가』를 번역할 만큼 탁월한 고전 지식을 자랑했고, 그 결과 그의 유명세는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알프스 이북의 잉글랜드와 스페인 등지에서까지 뚜렷이 감지되었다. (중략) 오랜 기간 밀라노 궁정에서 공작의 비서이자 조신으로 활동한 탓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에게도 그는 지적·정치적 차원 모두에서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한때 최고로 인정받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잊힌 불운한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 p.118~119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치 있는 기예 가운데 그가 통달하지 못한 그 어떤 분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1430년대 후반 3인칭 서술자의 목소리로 쓴 자서전에서, 알베르티는 이렇듯 자부심 넘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문학은 물론이고 음악과 조형예술, 심지어 마장술과 군사 분야에까지 능통한 다재다능한 인물로 포장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알베르티의 이미지는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 자전적 기록에 환호한 부르크하르트가 그를 모든 문화적 요소에 통달한 ‘만능인uomo universale’으로 손꼽은 탓이다. 19세기의 이 스위스 역사가에게 15세기 이탈리아는 집단주의라는 미몽 아래 인간의 정신이 지배되던 중세적 질서에서 벗어난 새로운 세계였다. 주체적이고 천재적인 인간들이 자유롭게 경합하면서 자신들의 재능을 분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알베르티는 단연 그 선두주자였다.
--- p.156~157
발라는 무언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곱씹고 재해석하는 비판적인 태도야말로 학자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라고 강조했다. 고대인들의 권위와 전통을 무시하고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오만과 독선의 소유자라는 비판이 종종 그에게 가해지곤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 『위작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연설』을 쓴 그해 여름, 그가 한 친구에게 던진 질문은 더할 나위 없이 인상적이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 학문 세계에서 앞선 이들을 비판하지 않고 글을 쓴 이들이 누가 있었는가? 다른 이들의 오류, 그들이 누락하거나 과도하게 진술한 무언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지 않는다면, 글을 쓰는 다른 어떤 이유가 있겠는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그의 성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비판의식을 놓친다면 어쩌면 발라를 한낱 고집불통의 싸움닭으로만 치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깊이 있는 ‘역사의식’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 p.184
특히 인간의 관점에서 변주된 새로운 창조 신화를 내놓으면서 피코는 이른바 ‘르네상스 인간학’의 정초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간은 가변적인 본성과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영위하는 자기 삶의 ‘조형자’요 ‘조각가’라는 주장이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매력적인 공명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 p.200~201
우리의 시선을 더욱 사로잡는 것은 브란돌리니가 공화정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례로 당대 피렌체를 논쟁의 도마 위에 올렸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그 꽃의 도시는 물적 탐욕으로 가득 찬 상인들의 국가이며, 따라서 그곳에서는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그 결과 누구도 평등할 수 없었다. 통제되지 못한 사적 소유가 정의와 절제라는 공동체의 근본 원리를 훼손한다는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을 인용해 법은 한낱 ‘거미줄’과 같다고 조소하는 브란돌리니의 모습을 진부한 수사가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중략) 자신보다 약한 존재만을 가두어둘 수 있을 뿐 강자라면 언제고 쉽게 끊어내는 거미줄처럼 “부유한 이들은 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반면 “가난한 이들은 법의 그물 속에 갇혀버린다”는 생생한 묘사의 호소력 때문이다.
--- p.232~233
스칼라는 르네상스기의 역동적인 사회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상징적인 인물이다. 르네상스기를 통틀어도 그만큼 극적인 신분상승을 경험한 이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1430년 토스카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보잘것없는 방앗간 임차인의 아들로 태어난 스칼라는 서른다섯 즈음 피렌체의 제1서기장이 되었고, 이후 도시의 최고 정무관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와 걸핏하면 다툰 당대의 시인 폴리치아노나 16세기 피렌체의 역사가 귀차르디니 등이 스칼라에게 퍼부은 냉소마저 당연해 보일 정도로 그의 성공은 남달랐다. (중략) 특히 피렌체의 국부로 칭송되던 코시모에 이어 피렌체 정치계의 주역으로 성장한 ‘대인’ 로렌초에게 스칼라는 최고의 조력자였다. 그가 권력을 장악하고 안정시키는 데 스칼라가 기여한 바가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스칼라는 메디치 정권을 지탱해준 중요한 지식인 관료이자 메디치 가문의 이해를 현실정치 세계에서 대변한 ‘얼굴 마담’ 같은 인물이었다.
--- p.242~244
마키아벨리야말로 냉혹한 힘의 정치를 현란한 언어로 대변한 새로운 정치사상가라고 평해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중략)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을 관통하는 주제는 ‘정치권력’ 그 자체였고, 그는 그것의 실상을 대담하면서도 위험한, 심지어는 불경스러워 보이는 언어로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무엇보다 그는 정치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문제에만 천착할 뿐, 그것을 어떻게 정당화할 것인가라는 전통적인 정치사상의 주제와는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당대부터 오늘날까지 몇몇 사람이 마키아벨리를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은 반도덕주의자, 더 나아가 현실적인 이해에 따라 정치적 신념을 이리저리 뒤바꾼 기회주의자로 폄훼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이름(니콜로)을 빗댄 ‘올드 닉Old Nick’이라는 표현이 오늘날까지도 악마라는 뜻으로 누군가를 지칭하기 위해 쓰일 만큼 여전히 마키아벨리는 우리에게 반도덕의 교사이자 대명사로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군주론』에서 종종 발견되는 과장이나 비약, 여러 모순적인 주장, 날카로운 분석 뒤에 은밀히 몸을 감춘 아이러니 등을 고려하면, 그를 한마디로 단정 짓는 것은 마키아벨리라는 거대한 빙산을 마주하고 그저 그 일각만 바라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 p.255~258
카스틸리오네는 고전적 덕의 이상이 정치 세계의 엄정한 현실 속에서 새롭게 변모하며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연기자 같은 인간’이라는 관념을 빚어냈다. 길들여진 동의, 권력이 강제한 예절, 외부 시선을 의식한 통제적인 자기연출, 이것이 바로 카스틸리오네가 그려낸 궁정인의 모습이다. 예절과 에티켓을 강조하는 유럽의 문명화 과정은 그렇듯 권력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서 시작했고, 좋든 싫든 르네상스는 그렇게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 p.2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