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섬(香港島)은 1800년대 중엽인 아편전쟁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매우 애매한 곳이었다. 홍콩을 표현할 때 ‘애매한 신세’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도 예전이나 지금이나 뚜렷한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당시 홍콩섬은 중앙정부 통제권이 미치기도 하고, 해적들이 드나드는 곳이기도 한 인구 8천 명 정도의 어촌이었다. 그런 홍콩섬을 제국주의 영국이 주목했다. 홍콩섬과 주룽반도(九龍半島)가 얼마나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인지는 동남아시아 지도나 세계지도를 놓고 들여다보면 바로 알 수 있다. 홍콩섬은 중국 대륙과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관문임과 동시에 태평양을 향하는 길목이다. 나아가서 유럽,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의 해운을 연결하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광둥성(廣東省)의 젖줄인 주강(珠江)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 중국 내륙으로 진출이 쉽다. 게다가 황해로 거슬러 올라가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다. 오늘날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핵심 정책인 세계를 띠(帶) 하나와 길(路) 하나로 연결하자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의 그림이 그대로 보이는 곳이다. 홍콩섬은 수심이 깊어 큰 배가 정박하기 좋은 천혜 항구였다. 일찍이 바다를 오가는 세계인들에게 생필품을 보급하는 보급기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홍콩은 아편전쟁으로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아니,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고 일반적으로 서술된다.
--- p.31, 「1장 「아편과 전쟁과 역사」」중에서
홍콩인들이 지금까지 영국 통치에 대해 연연해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교육의 자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1971년에 공포된 홍콩 교육법에 의하면 수업이나 관련 활동에는 정치적인 노래, 무용, 구호 등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 법은 정치교육을 하지 않겠다는 홍콩 정부의 의지를 더욱 추동했다. 교육이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보장받았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 학문의 자유일 것이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학문의 자유는 사회 발전으로 이어졌다. 홍콩인들 두뇌(유전자)는 이런 환경에서 성장했던 것이다. (…)
하지만 1997년 중국으로 주권이 반환될 즈음부터 국가와 민족은 홍콩인 두뇌를 향해 시시각각 도발해 오기 시작했다. ‘국민교육센터’를 중심으로 다양한 활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그즈음부터 홍콩인들은 텔레비전 뉴스에 앞서 ‘마음은 조국과 하나’라는 ‘국가홍보영상’을 보아야 한다. 2015년 중국 정부는 ‘국가 안전 교육일’을 제정했다. 매년 4월 15일 홍콩에서도 교육국과 보안국이 주축이 되어 강연과 전시 등 각종 활동을 전개한다. 2021년부터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국가안보에 대해서 교육을 받는 등 이제 그들 두뇌는 완전히 다른 (교육) 환경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더불어 두뇌(유전자) 구조도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 p.100~101, 「5장 「체제와 교육」」중에서
문화대혁명에 이어서 홍콩인들의 마음은 다시 중국으로부터 완전히 이탈되었다. 홍콩이라는 정체성이 다시 힘을 얻었다. 홍콩에서 중국공산당이라는 어휘는 금기시되었다. 홍콩인들의 두뇌에 ‘너희 중국’은 독재, 잔혹, 야만으로, ‘우리 홍콩’은 민주, 인도, 문명이라는 이분법이 자리 잡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집단기억’에는 반드시 타자가 등장한다. 타자화는 ‘미워하기’와 ‘구분 짓기’, ‘편 가르기’라고 할 수 있다. 타자는 나와 ‘더불어 같이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 천안문광장에서의 유혈진압에 대한 집단기억은 홍콩인 정체성을 구성하는 첫 번째 요인인지도 모른다. 시기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홍콩인들에게는 그만큼 큰 충격으로 와닿았다. 홍콩인들 유전자에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공산당에 대한 원초적인 공포를 확인하고 다시 각인시킨 사건이었다. 홍콩인들은 공황에 빠졌다. 주가지수와 부동산 가격이 폭락했다. ‘너는 어떻게 할래?’라는 말이 서로의 인사가 되었다. ‘64천안문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9년에만 4만 명이, 다음 해인 1990년에는 6만 5천 명(홍콩 인구의 1%)이 홍콩을 떠났다. 홍콩의 정체성이 다시 전환되고 재편되고 있었다.
--- p.192~193, 「11장 「64 천안문 민주화 운동」」중에서
‘중국-홍콩 체제’는 전근대와 근대, 다수와 소수, 특수성과 보편성의 대립구조이기도 하다. 어쩌면 모든 갈등이 근대와 전근대라는 도식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홍콩이 민주와 과학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중국은 국가와 민족을 앞세운다. 중국이 여전히 국가나 민족 이데올로기를 숭상한다면, 홍콩은 말끝마다 합리성을 내세우는 정체성이다. 중국 정부는 중국적인 정체성을 주입해야 문제 해결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중국은 홍콩을 향해 국가와 민족 이데올로기 주입에 총력을 기울였다. 홍콩인들을 빠른 시간 내에 국민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중국과 홍콩이라는 정체성은 다시 작은 정체성으로 나누어진다. 중국에도 홍콩에도 각각 여러 개의 작은 정체성이 있다. 즉 작은 정체성들이 모여서 큰 정체성을 구성하는데, 중국과 홍콩은 각각 작은 정체성들의 총합이다. 그 작은 정체성들의 변화는 큰 정체성의 변화와 직결되며, 큰 정체성은 다시 작은 정체성에 영향을 준다. 책 앞에서부터 살펴보아 왔듯이 정체성은 외부의 충격 또는 내부의 갈등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한다. 1997년 주권 반환 이후 ‘중국-홍콩 체제’는 수많은 갈등을 보여주었다. 중국은 홍콩을 확고한 중국 정체성으로 포섭하기 위해, 홍콩은 자기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요지부동인 중국 정체성에 비해 홍콩 정체성은 더욱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갔다. 홍콩 정체성의 역사가 생성, 분화, 재조립되듯이, 정체성으로 보면 망하는 역사는 없다. 역사는 부단히 재편되고 재조립될 뿐이다.
--- p.352~353,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