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 관념을 지닌 인간은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을 투사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안을 극복해 나아간다.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불안 극복을 위한 왜곡을 인간의 구성 요소 안에서 실행해 나아간다. “이성, 의지, 심정이 그것이다.”16 다시 말해 그리스도교의 신 혹은 신학이란 인간이 ‘지(知), 의(意), 정(情)’을 통한 자기 무한 본질의 외화에 불과하다. 그럼으로써 이제 인간은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자신이 직접 수행해 가야 하는 존재자로 드러난다. 세상에 그 어떤 절대적 기준도, 신적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홀로 이 땅에 서 있어야 하며, 자신의 위대함을 견뎌내면서 세상을 살아내야 한다.
--- 「1장|신학에서의 ‘철학적 신학’」 중에서
니체가 기독교 비판을 자신의 중심 주제로 삼는 이유는 진정한 인간과 삶의 실현 및 회복을 위해서였다. 그렇지 않고 생명의 본모습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결국 계속 노예들의 정신병적 유일신론 안에서 자기를 부정하면서 평안한 삶을 획득하는 학습을 받아야 한다. 평안한 삶이란 우리에게 사실상 주어질 수 없기 때문에 니체는 삶의 끊임없는 투쟁 안에, 즉 확신과 불안의 지속적인 순환운동 안에 빗겨나가지 않고 서 있기를 사람들에게 요구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절대적인 어떤 것은 결코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적 이념을 만들어 냄을 통해 불안을 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불안 안으로 들어가 그것을 견뎌내야만 한다.
--- 「3장|니체의 철학적 신론」 중에서
인간은 일자와 전적 타자의 대립 ? 투쟁 한 가운데에 속하며 또한 속할 수 있는 존재자로서 존립한다. “현존재의 본질은 타자와 그와의 대립성(Ausgesetztheit)에서 기인한다.” 즉, 그는 타자가 비워둔 빈 공간 안에서만, 즉 전적 타자의 열린 빈터 안에서만 특수한 방식으로 실존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의 본질이 그의 실존에 기인할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인간이 무에 들어가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미 무가 그 자신을 타자로서 그리고 일자의 개방성으로서 자신을 비워 놓고 있기 때문이다.65 인간은 존재의 차원이 아닌 무의 차원에서, 즉 타자가 자신을 비우는 바로 그 차원에서 존재하며, 이러한 이유에서 형이상학적인 존재를 통한 인간 규정은 이제 무로서의 타자를 통한 인간 규정으로 변경된다. “왜냐하면 근거 없고 우연적인 전적 타자의 현재에 의해 인간 현존재는 규정되기 때문이다.”
--- 「6장|현대 신학의 무로서의 하나님 이해」 중에서
맥페이그에 따르면 전통적인 창조 이해는 신의 절대성만을 주장함으로써 전적인 인간의 타락과 대속의 기독론이라는 왜곡된 이야기만을 하고 있다. 즉,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초점이 신의 행위에만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전통적인 창조 이야기는 언제나 단순한 ‘왜’라는 물음만을 묻게 되고 만다. 그리고 창조 이야기는 신이 주인공인 드라마에 불과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맥페이그에 따르면 창조와 섭리에서 우리가 가져야 하는 관심은 ‘왜’가 아니라 ‘어디에서’로 전환되어야 한다.24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이웃을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읽어내야 한다.
--- 「8장|에코페미니즘 신학의 철학적 신론」 중에서
현대 신학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와 유지는 그의 비움과 고통당함을 근거로 하여 설명된다. 하나님은 직접 자신을 비워 시간 안에 들어와 세계를 창조하고 또한 유지하며, 그래서 그는 철저히 역동적이며, 계속적인 창조를 수행하고 있는 분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기-비움의 특성은 이미 태초의 창조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며, 신의 사랑의 발현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불변하며, 정적인 자가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절대불변을 비워나가는 동적인 분이다. 그는 자기-비움을 통해 창조하는 분이며, 그래서 창조의 법칙이란 바로 자기-비움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 「10장|케노시스의 신론과 인간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