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와 해방, 해방공간의 정치적·사회적 혼돈 상황, 그 혼돈의 극단인 전쟁을 통과하면서, 다시 혁명과 그에 대한 반동인 군사쿠데타를 경험하면서 김수영의 시는 그 모든 것에 맞서려고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넘어가기 위해 김수영의 시는 결국 모든 것을 새롭게 정초하는 사명을 받아들여야 했고, 그러는 와중에 시가 난해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저는 봅니다. 물론 그보다 더 쉽게 써서 새로운 시간도 정초하고 독자들과도 폭넓게 교감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것은 김수영의 상황을 살아보지 않은 우리의 응석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응석이 김수영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기만 하고 김수영을 제대로 읽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 p.22
김수영의 “혼란”을 거의 그대로 정치적 혼란과 등치시키면 안 되겠습니다만, 정치 상황과 무관한 추상적인 실존의 혼란이라고 부르는 것도 진실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실존이라는 것이 구체적인 시공간과 무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시공간을 떠난 진공 상태에 인간은 처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면 김수영의 “혼란”에 여러 가지 원인이 작용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며 한참 뒤에 쓴 산문에서 그 시절을 돌아보며, “그 시대는 더욱이나 나에게 있어선 텐더 포인트다”라고 한 고백을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텐더 포인트”를 「공자의 생활난」과 겹쳐 읽는 것은 억지스러운 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말했듯 작품에서도 분명히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바로 보마”는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미래를 전혀 예측할 수 없는 혼란기의 복판에서 김수영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단호한 현실 인식인 것이죠.
--- p.37
“나”는 “영원히 나 자신을 고쳐가야 할 운명과 사명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자기 극복’에 대한 자의식을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내는데, 문제는 이 자의식이 일회적이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이 의지는 앞으로 김수영의 시를 읽는 데 아주 중요한 바탕으로 삼을 만합니다. 그리고 이 자기 극복 의지는 단순하게 김수영 개인의 수양과 고양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이 사는 현실, 즉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의지와 한 몸이 됩니다. 김수영의 시에 비상한 생동감과 힘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조건을 넘어서고자 하는 ‘바람’으로 인한 것입니다. 개인의 수양과 고양에 머물렀다면 그의 시는 한없이 정적이었을 겁니다. 김수영의 시 전편을 읽어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독자들이 기억하고 있는 그의 ‘좋은 시’들은 대부분 개인의 문제와 역사의 문제를 한 몸으로 삼은 것들이며, 그래서 아직까지도 그 생동감과 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 p.83
작품의 문맥에서만 보자면, 지금 김수영은 전쟁이나 전쟁이 남긴 폐허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그것에 대해 통곡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중에 그의 산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그는 여린 사람이긴 했지만 약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김수영이 말하고 있는 것은, 정확하게 전쟁의 폐허 위에서 자신도 모르게 갖게 되고 또는 현실에서 번식하고 있는 “달나라의 장난”입니다. 폐허에서 허무주의와 맹랑한 이상주의는 자라기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김수영은 “스스로 도는 힘”과 “공통된 그 무엇”을 간직하고자 합니다.
--- p.86
시에서 느끼는 힘, 생동감, 생기 같은 것을 말하다가 약간 다른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무튼 떨어지는 폭포에서 힘을 느낀다면 그것은 폭포를 형성한 힘이 넘쳐서 우리에게, 이 작품에 즉하자면 시의 화자에게 건너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힘을 갖춰야 합니다. 즉 그 힘을 받아 안을 수 있으려면 폭포를 느끼는 주체에게 그에 걸맞는 힘이 있어야 하죠. 그 힘을 느끼지 못한다면 폭포의 힘은 건너오다가 맙니다. 폭포에서 힘이 건너오지 않으면 우리는 폭포를 감각하는 수준에 머무는데, 사실 이 감각도 자신이 갖고 있는 힘에 의해 차이가 납니다. 폭포의 힘에 걸맞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폭포의 힘을 온전히 받아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폭포를 사유하게도 합니다. 시는 사유라는 말도 있는데, 결국 자신이 가진 힘, 즉 존재 역량이 그것을 결정합니다.
--- p.136~137
인생이라는 것은 서두른다고 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슴속에 있는 “빛”을 꺼버려서도 안 됩니다. “빛”이 자신의 시대를 태울지 어쩔지는 알 수 없지만, “빛”을 버리면 우리는 본능에 묶여버리고 맙니다. 생명의 본능은 우리의 이성적 사고를 통해 보다 더 높아져야 혹은 깊어져야 하고, 이성적 사고는 “빛”을 따라 종교로 고양됩니다. 제가 말하는 종교는 제도화된 기성 종교가 아닙니다. 본능과 이성, 그리고 감성과 영성은 우리 몸 안에 본래 갖춰져 있는 것인데 시대와 문화에 따라 하나가 다른 것들을 억압하면서 과대 대표합니다. 김수영의 시에서 영성은 지금껏 잘 조명되지 못했습니다만, 그것은 우리가 이성적 사고를 강요하는 ‘시대의 명령’에 익숙해서일지도 모릅니다. 근대주의적 사고방식이죠. 좋은 시는 과연 어딘가에 영성이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 p.162
저는 「사랑의 변주곡」을 김수영이 쓴 혁명시의 최종점이라고 보는 입장인데요, 왜냐하면 혁명이라는 것이 일회성 봉기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진리에, 짧지 않은 방황과 모색을 통해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혁명 직전에 ‘사랑’을 말했다가 다시 여러 우회로를 거쳐 도달한 세계도 ‘사랑’이라는 점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김수영의 ‘사랑’에는 이런 깊이가 있습니다. “너”를 통해서 사랑을 배웠지만 뒤집어 읽으면 “너”를 사랑함으로써만 사랑은 내게 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사랑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만 사랑을 배울 수 있고 사랑을 배울 수 있을 때만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너로 해서” 배운 사랑이 구체적인 현실 속에 폭포수처럼 쏟아진 것이 4·19혁명 직후의 시들인데, 사랑을 잃게 한 것은 5·16쿠데타였죠.
--- p.186~187
혁명의 퇴행에 대한 김수영의 실망은 점점 깊어가고 다시 피로를 느끼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1950년대 후반 즈음과 약간 비슷합니다만, 그때의 김수영과 지금의 김수영은 다릅니다. 혁명을 살아봤기 때문입니다.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서 비록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이 눈을 깜짝거린다”고 쓰지만 그렇게 깊지는 않습니다. 이 소품에 인상적인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것은 2연 1행인데, 이렇게 써 있죠. “오오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 바로 이때이다”. 그러고 보면 김수영이 말하는 사랑은 역사적 현실에 감응하는 그만의 에로스(eros)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수영의 영혼에 사랑이 가득할 때는 ‘그림자’가 없는 경우입니다. 편한 대로 에로스라 불렀지만 어쨌든 긍정의 기운 또는 고양과 초월의 기운이 생기할 때를 김수영은 ‘사랑’이라 부르는 것 같습니다.
--- p.225
아무튼 「반달」을 쓴 즈음인 1963년 가을 무렵에는 역사의 진실에 대한 인식을 얻고 스스로를 치유합니다. 육체의 상처든 정신의 상처든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동안에는 사람은 누구나 비관적으로 되거나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인 상태에 머뭅니다. 어쩌면 이런 심리적 반응 자체가 상처를 치유하려는 생명의 본능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런 반응은 그 사람을 점점 더 수렁으로 빠뜨릴 수도 있고 관계에 있어서 부정적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무슨 대단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면서 흔하게 경험하는 사태입니다. 현대에는 외래 진료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육체의 상처야 그렇다 치더라도 정신의 상처도 대부분 외래 진료를 통해 치유하는데, 이것이 의료산업을 낳습니다. 본질적으로는 ‘산업’이 된 의료 행위가 상처의 종류와 정도를 판단하는 권위를 갖고 끊임없이 우리에게 치유를 외주화하라고 강요하는지도 모릅니다.
--- p.270
결국 “복사씨와 살구씨와 꽂감씨”가 무엇이냐는 점입니다. 저는 여기서 이것이 무엇이다 투의 단정적인 도식을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시는 그러한 도식으로 갇히지도 않지만 가둬서도 안 됩니다. 먼저 이 ‘씨들’은 김수영의 생활 권역 내에서 손쉽게 접하거나 혹은 입으로 오르내린 사물일 개연성이 높습니다. 두 번째로는 5·16쿠데타 이후 그것의 돌파를 위해 김수영이 지난 시간을 반복적으로 삶으로써 발생시킨 새로운 (정신적 의미의) 개체의 상징일 수 있습니다. 즉 이 ‘씨들’은 시의 문맥상으로 보면 김수영이 역사를 되풀이 삶으로써 다시 시작된 개체발생을 감각적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역사의 잠재태로서의 ‘씨들’인데, 이 주장은 제가 알기로 이미 연구자나 비평가들 사이에 제법 제출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막연한 잠재태 규정은 제가 제시한 두 번째 주장(역사를 되풀이 살면서 발생시킨 새로운 개체발생)을 상정하지 않으면 근거 없는 추정일 뿐인 데다 특히나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인 들뢰즈의 잠재성 개념을 김수영에게 덮어 씌웠다는 반론에 말문이 막힐 소지도 있습니다.
--- p.342
자기 집에 식모 살러 온 소녀인 순자의 눈빛을 통해서 자신의 허위를 통렬하게 반성하면서 “풀의 아우성”을 느끼는데, 이때에 함께 등장하는 것이 “바람의 아우성”입니다. 당연히 이게 순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러한 시적 사유의 온축을 통해 “풀”로 상징되는 존재의 “바람”에 대한 직관을 김수영은 얻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한편으로 “풀”은 순자나 “중앙선의 복선공사에 동원된/ 갈대보다도 더 약한 소녀들과 부녀자들” 같은 타자들만이 아닐 겁니다. 전쟁과 혁명과 쿠데타라는 시간을 통과해온 김수영 자신 안에 이미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가 맺혔으며, 현실에서 느꼈던 “풀”은 결국 자신 안에서도 자라고 있던 풀이었을 겁니다. 결국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거나 우는 “풀”은 화자 자신이기도 한 것이죠.
--- p.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