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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문학동네시인선-201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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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0월 19일
쪽수, 무게, 크기 152쪽 | 188g | 130*224*20mm
ISBN13 9788954697774
ISBN10 8954697771

카드 뉴스로 보는 책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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솥은 우리 가문의 자랑 큰할머니와 할머니와 엄마는 솥에서 태어났다 이모는 솥뚜껑에 맞아 죽었다 언니는 솥 아래서 불타 연기가 되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솥에 누군가를 넣고 누군가를 꺼내며 누군가는 솥을 걱정한다 솥에 들어갈 사람이 점점 부족해 누군가 내게 너는 주워온 게 분명하다고 한다

(…)

나는 솥에서 태어나 솥을 맴돌며 솥으로 돌아갈 사람이고 솥밖에 모르는 사람이고 솥이 없으면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고 결국 백지에 불을 붙여 솥에 던져 넣게 될 사람이다 마당이 연기로 가득해 경보 소리가 울리고 어른들이 도망가면 그 뒷모습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다 나는 솥의 자랑일 것이다
---「솥」중에서

열두 장의 흰 종이를 내밀며 너는 달력이라고 했다 곧 적당한 때가 올 거라고 했다 (…) 적당한 때란 무엇일까 서서히 잠이 쏟아진다 네가 준 열두 장의 종이에 꿈 이야기를 쓰려고 했으나 글로 옮기는 순간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초기화」중에서

하지만 돌이켜보면 나에게 필요했던 건
마주볼 수 있는 눈과 귀였지

너는 가장 아름다운 방식으로 나를 서서히 망쳤고
나도 사실은 너를 망치고 있는 건 아닐까 언제나 두려웠어

안전하고 무해한 것들만 믿으며
좋아하는 것들에 둘러싸인 채
---「초기화」중에서

나는 순간 황홀해진다
눈밭 속에
홀로 절이 서 있다

하얀 문과 검은 지붕
검은 지붕 위 쌓여가는
하얀 눈
정지한 세상
고요하고 무궁하게
---「검은 절 하얀 꿈」중에서

내가 찾고 있는 그것은 조용하고 둥글다 그것은 초록색과 파란색을 적당히 섞어놓은 듯한 색을 띤다 그것은 불타오르며 깨진다 그것은 눈을 감는다 침묵한다 그것은 알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시 둥그런 형태를 취한다 하지만 자주 형태를 바꾸고 색깔을 잃어버린다

그것은 내가 찾고 있는 것이 되었다가 나를 이 절로 보낸 사람이 찾고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이 절에 있다 그것은 이 절을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절 뒷마당에 있는 연못도 아니고 연못에 기울어진 버드나무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울어진 버드나무를 더 기울게 만드는 무엇이 되기도 한다

무엇이었다가 곧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검은 절 하얀 꿈」중에서

시인과 경찰과 교수 역할을 맡은 아이들 틈에서
푸르게 반짝이는 옷을 입고 바닥에 누워 있던 장면

이브나 파커는 곁눈질로 아담의 눈물 젖은 얼굴을 눈치챘다
정말 아름다운 시냇물이구나, 생각하며
---「이브나 파커」중에서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

읽던 소설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를 미워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 책의 유일한 결말은 아니니까

(…)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는 찰나에도
두부는 아주 평화롭게 구워진다

이것은 소설일까 아닐까

고개를 들면 온통 하얀 창밖과
하얗게 뒤덮인 사람들이 오고가는 풍경

모든 것이 끝나도
어떤 마음은 계속 깊어진다
---「두부를 구우면 겨울이 온다」중에서

짙은 어둠 작은 열차를 타고
우리는 고요한 잠을 찾아가고 있었지

작은 무늬들로 가득한 기린의 뒷모습
그의 어깨가 가만히 오르내리면 우리는 그의 평화로운 꿈

여기 해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나이트 사파리」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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