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윤재(奇潤齋)를 짓는 데 1년 4개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들인 시간만큼 집이 얼마나 충실히 우리를 반영하는지에 대해서만 쓰려고 했다. 그런데 이 집에서 말문이 터진 아이가 2층 집을 8층 집이라고 부르던 날, 집은 단지 삶의 내용을 따라잡은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의심했다. 아이방 앞 작은 복도에 서서 어릴 적 느끼던 두려움을 극복한 날, 집이란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다시 살게도 하고 예전과는 다른 내일을 그리게도 하는 힘이 있다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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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 너머로 펼쳐지는 집에 대한 상상은 대개 물결에 닿아 부서지는 햇빛처럼 곧 흩어져버린다. 소유하고 싶은 이미지의 파편들이 물밀듯이 들어와도 콜라주로 완성되기는 드물다. 실체가 없이 어슴푸레하게 느낌만 있는, ‘로망’이라는 단어로 포장되어 머릿속에서 유영한다. 질서가 없는 로망은 허황되지 않음에도 백일몽에서 그친다. 그래서 전원주택이란 우리에게 영원히 로망, 단어 그 자체로 남는 걸까. 생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는 흐리멍덩한 몽상이 아니라 선명한 비전이 필요하다. 누가 이 작업을 방해하는가. 내면에 뿌리박힌 불안이다. 피할 수 없는 위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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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바다에, 산에 그리던 문을 열고 현관에 들어서던 날을 기억한다. 마루를 깐 다음 날이었다. 그전까지 신발을 신고 큰 창을 통해 현장을 드나들던 작업자들이 현관에서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나만이 볼 수 있던 문을 사람들이 여닫을 수 있게 되었고, 이제 현장은 집으로 불렸다. 현관의 문지방을 넘는 순간, 선택의 발자국이 찍히고 로망은 현실이 되었다.
--- p.31
창문은 하얀 벽과 함께 집 안의 안색을 완성한다. 따뜻한 색조의 흰 벽에 푸른 새벽, 하얀 낮, 붉은 일몰, 까만 밤이 드러났다가 사라진다. 그에 따라 내 얼굴도 푸르렀다, 발그레하고 또 검어진다. 조명으로 꾸미지 않는 민낯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햇님이 요즘 일찍 일어나네. 원래 내가 먼저 일어났는데.” 아이가 전보다 밝아진 집의 안색을 알아차리고 창밖을 살핀다. 우리는 일관된 것들에 관심을 쉬이 잃고 변화하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끊임없이 변하면 눈을 뗄 수가 없다. 이것은 매력을 넘어선 마력이다.
--- p.38~39
차를 우릴 물을 올리기 위해 손에서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다. 한껏 열어젖힌 문으로 자연을 초대한다. 호박처럼 펑퍼짐한 유리 탕관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새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목소리들이 수다스럽게 제각각이다. 물이 보글보글 끓자 물고기 눈 같은 물방울들이 쉴 새 없이 수면을 치고 올라온다. 물을 부어 차를 우려내는 동안 바람의 숨을 맡는다. 바람도 앉아서 차 한잔하며 쉬다 갈 수도 있겠지. 우린 찻물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 깃든 세계를 가늠한다. 이윽고 나도 녹여낸다. 이 차 한잔과 함께 자연의 너른 마음에 안길 수도, 내면의 깊은 우주에 닿을 수도 있다. 홀로 앉아 있지만 외롭지 않다. 마음을 열면 수많은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p.48
가족들 이름을 하나씩 적어보았다. 남편은 비밀의 문이나 출동봉 같은 기발한 요소들을 설계에 녹여주길 바랐다. 그런 그의 이름에 새롭고 뛰어나다는 뜻을 가진 奇(기특할 기) 자가 담겨 있었다. 햇살이 넉넉하게 비추는 밝고 따뜻한 집에서, 여유롭게 살고 싶은 우리의 바람은 아이의 이름에 潤(윤택할 윤)으로 현현해 있었다. 해답은 정말 우리 안에 있었다. 기윤(奇潤). 좋다.
--- p.58~59
집이란 사는 장소의 형태에 한정되기에는 너무 큰 개념이다. 짓는 것과 사는 것이 일치할 때 거주가 이루어진다는 김광현 교수의 말대로, 집이란 ‘거주’의 의미가 있는 구상적이자 추상적인 개념이다. 주택과 그 안의 사물, 사람, 생활 방식이 한 세트가 되어야 비로소 집이 완성된다. ‘집’이라는 이름의 앨범이 완성되려면 흐트러진 이불, 요란한 생일 파티, 창문에 맺힌 결로, 다용도실 문을 닫고 들어가 아빠와 깊은 대화를 하는 아이 사진이 더해져야 한다.
--- p.97
밤새 비가 오고 난 이른 아침, 창문을 열고 젖은 땅에서 나는 냄새를 맡을 때 나는 왠지 모르게 감격스러워 울컥한다. 자연이 주는 본원적인 쾌감을 아이도 품고 자라길 진심으로 바란다. 학교에 다닐 때는 밖에 나가 놀 시간도 부족한데 풀까지 뽑아야 한다고 투덜거리던 내가 나이가 들어서는 풀 뽑기를 농도(農道)라고 부른다. 무릎부터 허리, 목, 팔목까지 온몸이 뻐근해도 머리만큼은 시원해지는 경험을 즐기게 된 것은 자연이란 서서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선생님에게 장갑은 어떨 때 쓰는 거냐고 질문을 받은 아이가 추울 때 끼는 것이 아니라 ‘풀 뽑을 때 끼는 거요.’라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나는 고개가 젖혀질 정도로 회심의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거야. 잔디 사이에 난 잡풀을 스스로 뽑으면서 땀에 젖은 몸으로 자연과 만나는 경험, 그 경험이 잊히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나의 계획이자 바람이었다. 자연과의 교감은 풀 한 포기에서 시작된다.
--- p.139~140
기윤재 안에 미끄럼틀은 설계할 때부터 넣기로 했다. 남편과 나는 특별히 이유를 나누지도 않은 채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종종 내려가려는 남편과 올라가려는 아이가 마주한다. 남편이 “내려가는 게 먼저야.” 하면 아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고 “왜?”라고 묻는다. 남편은 순리를, 아이는 역행을 이야기한다. 아니, 아이가 순리를, 남편이 역행을 이야기하고 있나. 어쩌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어서 미끄럼틀을 설치했는지도 모른다.
--- p.217
앎도 시절인연이다. 스님의 마지막 인사말을 바로 새긴다. 새벽 4시, 책상 위 스탠드를 켠다. 이슬 서린 새벽의 향기에 산사의 작은 방을 추억하지만, 돌아갈 필요는 없다. 이것 하나 아는 데 참 오래도 걸렸다. 모두가 자는 사이, 나는 작은 방으로 들어선다. 매일 2시간, 일상에서 탈출하는 시간이 일상이 되었다. 단출하지는 않은 방이지만 낯익은 것들은 나름의 질서가 있어서 단정해 보인다. 방문은 걸어 잠그지 않고 살짝 열어둔다. 문틈으로 빛이 조금 새어 나가도 좋다.
--- p.308~309
책장에는 시가 흐르고 그 시는 소유자의 자전적 시이다. 그러나 그 시는 선형의 시간순으로 흐르지 않는다. 책장에서 시간까지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주인뿐이다. 그 안에는 과거, 현재, 미래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책장을 보는 손님은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려서 현존하는 하나의 존재로 버무린다.
정리되고, 재배열되고, 편집되지만 여전히 나다운 책장 앞에 서 있다. 여기는 내 민머리와 맨가슴이다. 지금 책장을 들여다보라. 그 속에는 정말, 정말 많은 것을 담고 있다.
--- p.326~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