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긴말을 싫어하니 잘 들어라.”
“예.”
“너는 군왕의 자질과 품성을 두루 갖추었으나 가장 중요한 걸 지니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야.”
을불은 고개를 숙였다.
“아까 너는 사정도 살피지 않고 단도부터 빼들었는데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또한 너는 남보다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있다 했는데 그 역시 부끄러운 말이다.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하찮은 목숨은 하나도 없다. 무릇 군왕은 모든 백성의 목숨 한 조각 한 조각을 자신의 것보다 중히 여겨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성군들은 바로 그런 생각으로 백성을 섬겨왔다.”
을불은 부끄러움에 더욱 깊이 고개를 숙였다.
“오늘의 말씀,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 pp.114-115
“모든 나라를 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라. 적들 중에는 화친해야 할 상대가 있고 맞서 싸워야 할 상대가 있는 법이니, 어느 적과 화친하고 어느 적과 싸울 것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잘 해내면 다수의 약한 적들을 규합해 크게 영토를 넓힐 것이요, 잘 못하면 소수의 강한 적에게 침탈당할 것이니라.”
“다수의 약한 적은 친구로 만들고 소수의 강한 적에게 힘을 집중하라는 말씀, 큰 지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현도와 대방은 어떤 적입니까?”
“좋은 질문이다. 고구려는 여러 번 현도와 대방을 침하였지만 사실 그것은 무책이니라. 중요한 것은 낙랑이다. 모든 한족 세력의 뿌리는 낙랑이니 낙랑에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지금의 낙랑은 풍요롭고 군세 또한 만만치 않지만 중원의 진도 몰락하고 있어 고구려가 힘을 기르면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닐 듯합니다.”
“낙랑은 변한다. 진이 몰락하는 가운데 힘 있고 뜻 있는 진의 영웅들이 낙랑 땅으로 속속 모여들어 더욱 강성해질 터이니 당장 보이는 대로 생각할 일이 아니다.” --- p.119
“나는 을불이다. 돌아가신 돌고 공의 아들이자 선왕의 손자이며, 이 나라 최고의 무인이자 영웅이었던 안국군의 종손(從孫)이다. 왕 상부가 나를 찾아 죽이려 하기에 신분을 감춘 채 떠돌고 있다. 이만하면 충분한 대답이 되겠는가?”
--- pp.147-148
“긴말은 하지 않겠다. 황하족 유철이 이 땅을 점령한 후 사백 년간 요하는 짓밟혀왔고, 지난 백 년간 고구려는 현도, 낙랑을 단 한 발짝도 쫓아내지 못했다. 나라가 세를 키워 일어났을 때도 결국 그들을 몰아내지 못했으며, 주저앉을 적에는 그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휘둘려왔다. 과거 태조태왕께서 이들 군현을 격파했을 적에도, 명림답부가 좌원에서 후한의 군대를 섬멸했을 적에도 우리는 이들을 몰아내지 못했으며, 동천태왕께서 거대한 공손씨를 멸했을 적에도 그 영토는 모조리 진나라의 차지가 되어야 했다. 먼지 하나 남기지 않고 저들을 몰아내도 시원치 않은 판에 이제 저들이 우리의 철을 내놓으라 억지를 부리니 이것을 어찌 나라의 꼴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죽으면 죽었지 고구려의 정신을 팔지는 않겠다. 내게는 오직 저들을 멸하든 내가 죽든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이다!”
을불의 말이 떨어지자 고구려 조정의 모든 장수들이 우렁차게 외쳤다.
“저들을 멸하든 신이 죽든 둘 중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 pp.88-89
“성공을 거두려면 누구보다 더 차갑고 교활해야 한다는 제 생각이 폐하를 보는 동안 서서히 무너졌어요.”
아영의 목소리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게는 그런 따뜻함으로 이기는 길이 보이지 않아요. 저는 눈물이 없는 계집이에요. 머리와 외모는 있는지 몰라도 인정은 없어요. 그러나 폐하께는 그게 있어요. 당장은 손해를 보아도 결국은 승리로 이어지고 마는 내면의 힘, 그 힘이 저를 이끌었어요. 저는 진정 처음으로 인간의 길을 배웠어요. 바로 폐하로부터요.”
“몸도 약해졌을 터인데 복잡한 생각 말고 편안히 마음을 가지시오.”
“우리 아들도 아마 폐하를 닮았을 거예요. 고구려를 이끌어갈 수 있는 그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을 거예요.”
“틀림없이 그랬을 거요.” --- p.189
“큰불이 나면 적이 나올 곳은 한 군데뿐이다. 그 앞을 이만 궁수대가 기다렸다 쏘아대면 적은 반드시 전멸할 터. 들 곳 없는 요새란 바꾸어 말하면 날 곳 없는 함정이 되는 것이다.”
“참으로 영명하십니다.”
“인간이 모든 일을 다 머리로 짤 수도 없고, 머리로만 짠 계략은 완전하지도 않다. 최고의 계략이란 우연이 섞일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 p.264
“그래, 죽어주마! 내 자식이 이 빌어먹을 삶을 되풀이하지 않는다니, 내 통쾌히 죽어주마!”
화살 몇 대가 사내의 가슴팍에 꽂히자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내 아들은 지금부터 고구려의 백성이다아!”
또 다른 사내가 자리를 박차며 일어섰다. 그 역시 고노자에게 달려와 날아드는 화살을 온몸으로 받으며 죽어갔다. 이제 화살은 비가 되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 화살비를 향해 줄을 이어 불나방처럼 달려든 조선 유민들은 양팔을 활짝 벌렸다. 마치 죽는 것이 만족스럽기라도 한 듯, 가슴에 잔뜩 화살이 박힌 채 쓰러지는 이들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조차 떠올라
있었다.
“고맙다!”
마지막 힘으로 버티며 유민들을 바라보던 고노자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무너져 내렸다. 그의 앞으로 끝없이 조선 유민 포로들이 발을 끌며 몰려들었다.
--- pp.355-356
“나는 중걸을 믿고 목숨을 맡기겠다. 너희들도 나를 따르겠느냐?”
한결같은 외침이 돌아왔다.
“옛!”
“들었나? 중걸, 우리가 무엇을 하면 되겠느냐?”
이 숙연한 광경에 원목중걸은 깊이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차후로는 모든 장수들을 형제같이 여기고 믿겠습니다.”
“아니다. 너는 계속 의심하라. 내 들은 것은 적으나 책사의 덕목은 의심이라 하더라. 믿음은 군주의 덕목이다. 그러니 너는 네 할 일을 하고 나는 내 할 일을 하는 것이다.”---p.23
“어머님.”
문을 등 뒤에 둔 채 무는 아영을 작게 불렀다.
“제가 정효에게 한 말, 그대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고맙구나.”
“저는 정효를…….”
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자비로 맞이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천하의 여걸로 평생을 살아온 아영이건만 그 말에는 동요를 금할 수 없었다. 닫힌 문에 흔들리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그녀는 아무 답도 하지 못했다. 다만 온갖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드는 가운데 안타까운 마음을 추스르며 한마디를 던졌다.
“내가 아는 정효는…… 욕심이 없는 아이란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 버렸습니다. 정효를 잃을 듯합니다.”
“내가 얘기하마. 모두 네가 태자가 될 것으로 알았기 때문에 네게 잘못은 없다.”
“경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은…… 물릴 수 없는 것입니다.”
흘러든 바람 한 점 없건만 얇은 문은 미미하게 떨렸다. 무의 등이 떨린 것인지 아영의 시선이 떨린 것인지, 혹은 둘 모두인지 모를 일이었다. 두 모자에게 고구려 태자 책봉의 날은 그렇게 저물었고, 이후로 이날의 이야기는 다시 오가는 법이 없었다. ---pp.83~84
“왕후, 백성이란 무엇이오?”
“…….”
“군주란 또 무엇이오?”
“…….”
“전쟁에 이기면 왕실과 조정은 부유하고 행복하지만 싸우면 싸울수록 백성은 목숨을 잃고 불구가 되며 가정은 망가지지 않소. 전쟁을 피하여 더 이상 싸움이 없다면 왕실은 궁색하고 고관대작들은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들겠지만, 오히려 백성은 가정에서 식구들과 살 수 있지 않겠소? 나는 그때 확신을 얻게 되었소. 항상 전쟁에 이기고 그리하여 모든 백성들을 싸움터로 몰아내는 용맹한 군주에 비해 전쟁에 지더라도 백성을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해 애쓰는 옹졸한 군주가 못하지 않다는 걸 말이오.”
“…….”
“무는 너무 전쟁을 잘할 아이요. 백성의 수효도 얼마 되지 않는 이 고구려의 장정들은 그 아이를 따라다니며 끝도 없이 목숨을 잃고 팔을 잃고 다리를 잃을 거요. 군주는 백성의 희생을 바탕으로 자신의 영광을 이루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되오. 태자로는 사유가 맞소!”---pp.116~117
“백성 모인 것이 나라인데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듯 내면의 힘을 기른다면 나라가 강성해지지 않을 리 있소? 앞으로 고구려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겪을 것이오. 바로 태자에 의해.”
“…….”
“또한 이제껏 이루지 못했던 대제국을 건설할 것이오. 그 또한 태자로 인해.”
---p.295
마침내 평곽의 성문이 열리고, 단 한 기의 인마가 넓은 성문을 통과하여 모용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온통 뒤집어쓴 흙먼지에도 아랑곳 않고 아영은 이마께에 흐르는 땀을 닦고는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 그대로 모용인을 내려다보았다.
“고구려의 원군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어리둥절하여 묻는 모용인에게 아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고구려의 원군이다.”
“예?”
“내가 바로 십만 군사이며, 모용황의 숨통을 끊을 칼이다.”
아영의 형형한 눈빛을 마주한 모용인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그 허황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 평생 들어온 어떤 말보다 그를 강하게 전율시킨 까닭이었다.---p.78
“부왕께서 그리도 틀리셨나요?”
돌연한 물음에 놀란 왕후는 아들을 깊숙이 바라보았다. 작게나마 일그러진 구부의 표정으로 보건대 필시 제 아비를 비난하는 말을 들었음에 틀림없으리라. 안타까운 기운이 왕후의 고운 얼굴을 몇 번이나 스쳤다. 언제고 자신에게 던져질 질문인 줄은 알았건만 마땅한 대답을 준비하지는 못한 터였다.
“누군가 폐하를 욕하더냐?”
구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도 말이 없자 왕후는 다시 천천히 물었다.
“너는 폐하를 어찌 생각하느냐?”
“그게…….”
“편히 말해보거라.”
“전쟁은 서로 번갈아 따귀를 때리는 일과 비슷해요. 어느 한쪽이 맞고 그만두어야 끝나는 거지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때린 뒤 그만두려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맞고 끝내려는 거예요. 즉 사람들은 거짓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고, 아버지는 참으로 전쟁을 끝내려 하시는 거예요.” ---pp.145~146
“내 추한 어미가 싫었소. 나를 버린 당신이 싫었소. 나를 동정하는 사신장이 싫었고, 나를 구제한 원목중걸이 싫었소. 내 잘난 형제들이 싫었고, 점잔을 빼는 신하들이 싫었소. 죽은 당신을 잊지 못하는 백성들이 싫었소. 고구려를 이기지 못하는 장수와 병사가 싫었소. 마치 내가 모자란 것 같아 싫었소. 모두가 싫었소. 내 삶은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싫은 것투성이였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묵묵히 모용외의 봉분을 바라보다 박힌 돌덩이 하나를 뽑아내며 말을 이었다.
“좋은 것이 갖고 싶었소. 당신의 소원대로 고구려를 부수고 천하를 얻고 싶었소. 그리하면 당신도, 신하도, 백성도 모두가 나를 좋아할 것이라, 그 싫은 모든 것이 좋은 것이 되리라 믿었소.” ---p.206
“왕이란 흥미로운 사람이어야 한다. 흥미로운 사람만이 매력적인 법이고, 매력적인 사람만이 신하와 백성을 뿌리에서부터 휘어잡으니까.”
“…….”
“나, 연나라의 황제 모용황이 명하노니, 연나라 군사는 저길 넘는다.”
모용한은 모용황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보고 다물었던 입을 벌렸다. 젖혀진 막사의 문틈 너머로 내다보이는 그곳에는 신성을 고구려의 대문이라 불리게 한 거대한 벽,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은 산맥이 어둑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산을 타고 넘는 일을 밥 먹듯 하는 심마니들조차 함부로 들어서길 저어한다는 깊고 깊은 산세가 마치 넘을 테면 넘어보라는 듯 당당히 버티고 서 있었다.
“폐하, 아군의 군세가 육만이 넘습니다. 그만한 대군이 어찌 저 산맥을 타란 말씀이십니까.”
당연한 말이었다. 다치고 지쳐 낙오하는 이가 태반일 것이었고, 설령 넘는다 하여도 이후에 보급을 받을 방도는커녕 후퇴하여 돌아갈 길조차 차단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용황은 도로 눈을 감아버릴 뿐이었다.
“적도 너와 같은 생각이겠지.”
“하지만…….”
“전쟁의 승패란 장담할 수 없는 일이나, 산은 넘고자 하면 반드시 넘어지는 것이다.”---pp.233~234
“내 농부와 소를 본 적이 있다. 농부는 이미 죽어 있었고 소는 피골이 상접한 것이 오래간 굶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로 두면 소가 죽고 말 것 같아 몇 번이나 회초리로 때려 몰았는데, 이놈은 결코 농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너는 그 소가 왜 그러했는지 알 것 같으냐?”
이야기를 다 들은 밭주인은 무어 그런 것을 묻느냐는 듯 뚱한 눈초리로 구부를 보았다.
“정말 그것을 모르시겠습니까?”
그러고는 구부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피식 웃으며 답했다.
“밭을 갈아줄 농부가 죽었잖습니까. 소는 밭을 갈아야 먹을 것이 생기는 법인데 농부가 죽었으니 누가 함께 밭을 갈아줍니까. 제 밭을 갈도록 씨를 뿌려줄 농부가, 수확을 하여 여물을 먹여줄 농부가 죽었으니 어쩌겠습니까. 밭을 떠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밭주인의 이야기를 듣던 구부는 언제부터인가 얼어버린 얼굴이 되어 있었다. 이를 본 밭주인은 손을 들어 몇 번 그의 눈앞을 휘휘 저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러니까 소에게는, 소에게는 농부가 제 일꾼이었다는 말이냐?”
“물론입죠. 인간이야 소가 일꾼이라 생각하겠지만, 어디 소도 그리 생각하겠습니까.”
---pp.32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