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항상 이런 식이다. 어떻게든 자신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끝장으로 치닫게 만드는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 같은 경우에는 다행히 그 치열한 경주에서 기꺼이 제외될 수 있었다. 이곳에 막 도착해 출발점에 선 사람부터 결승점에 도달한 사람까지 온갖 부류를 알고 있었는데, 다들 얼마 후에는 하나같이 불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것을 보고 인생은 그저 방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년 초봄 어느 비 오는 날처럼 돈도 없는데 불운까지 겹친 현실만큼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날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어쨌든 내가 그 누구에게도 나쁜 감정 따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확실하다. 내게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것을 따라 살았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 p.15
나는 매일 바다를 보러 갔다. 주머니에 책 한 권을 찔러 넣고 오스티아행 지하철을 타고 가서 해변의 어느 작은 트라토리아에 앉아 거의 온종일 독서를 했다. 그리고 다시 시내로 돌아와 나보나광장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그곳에서 친구 몇 명을 사귀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처럼 배울 만큼 배웠고 불안하지만 기대에 찬 얼굴로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방황하고 있었다. 로마는 우리의 도시였고 우리에게 관대했으며 우리를 달래 주었다. 나 역시 실직한 이후 불규칙적인 일로 돈벌이를 하며 몇 주째 제대로 된 식사 한 번 못 하고, 누렇게 바래고 삐걱거리는 가구 몇 개가 전부인 음습한 여관방을 전전해야 했지만 로마는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로마라는 도시는 기억을 태워 버리는 특별한 성질을 갖고 있기에, 그 시절을 돌이켜 보면 아주 소수의 인물과 장소, 일에 대한 기억만 또렷이 남아 있다. 도시라기보다 꼭꼭 감추어 두었던 짐승 같은, 우리의 은밀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어여쁜 짐승은 언제나 사랑을 갈구하기에, 최고의 사랑이 아닌 어중간한 마음으로는 이곳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남부의 푸르고 가파른 길이든 울퉁불퉁하게 뻗은 북부의 도로, 혹은 저 깊은 영혼의 심연이든 그 출발지를 막론하고 로마를 찾는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유일한 통행료는 사랑, 오직 이것 하나뿐이다.
--- p.23~24
시내로 돌아오면서 지금까지 겪은 이별을 떠올렸다. 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를 했을 때를 떠올렸고, 산텔리아 사장님과 이별할 때도 떠올렸다. 그리고 이 모든 이별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해 봤다.
--- p.27
바깥은 약간의 떨림과 붉게 물들기 시작한 부드러운 공기로 가득했다. 그렇게 겨울과 봄이 서로 최후의 일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계절은 사람들 모르게 캄캄한 밤사이 바뀌었고, 우리는 그 웅장하고 고요한 변화를 구경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밤이었다. 내 옆으로 저만치 떨어져 있는 여자는 두 손으로 우비를 꼭 붙잡고 눈을 반쯤 감은 채, 자신의 정원에 우연히 찾아온 손님과 함께 있는 사람처럼 만족스러운 얼굴로 플라타너스 향기를 마음껏 들이마셨다. 나도 숨을 돌릴 겸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고, 아주 높고, 흘러가는 커다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 p.48
나는 도로 끝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감정을 다잡기 힘든 지경이었고, 술집으로 돌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참고 곧바로 집으로 갔다. 집에 들어와 일단 라디오부터 켰다. 탁상용 램프 가까이로 안락의자를 옮기고 푹신한 곳에 쿠션을 덧대어 놓았다. 그리고 손이 닿는 곳에 담배를 놓은 후, 독서를 할 때 들리는 그 설득력 있는 내면의 목소리에 빠져들어 보려 했다. 우리의 영혼이 다르면 그 목소리가 다르고 영혼이 같으면 그 목소리도 같겠지만, 어쨌든 우리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가지고 있던, 우리가 세상에 나오며 울부짖기 이전의 불협화음 없이 완벽한 태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 p.96~97
새벽이 되자 공기가 차가워졌고 계곡의 나무들은 새소리로 가득 찼다. 아리아나도 잠에서 깨어 함께 새소리를 들었다. 그러는 동안 방이 서서히 밝아졌고, 그녀가 일어나 옷을 입었다. “그냥 누워 있어요.” 그녀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보기 위해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창문으로 갔다. 그녀가 철문 쪽으로, 새벽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차키가 말을 듣지 않는지 잠시 실랑이를 벌이다가 차에 올라 출발했다. 나는 계곡이 보이는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흐트러진 침대를 보니 배가 뭉치는 느낌이 들어서 바로 이불을 털어 말끔하게 정리했다. 하지만 침대 시트에서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남아 있었고, 나는 차를 끓이러 주방으로 향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면서 라디오를 켰다. 예전 노래들과 세계 곳곳의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고려해 봤을 때,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 p.99~100
“나를 위한 게 아닌 건 분명하군.” 그라지아노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내게 헛소리할 생각하지 마. 내 눈은 속일 수 없으니까. 종일 화장실에 틀어박혀 끙끙거리고 있다가 해 질 녘이 돼서야 나를 데리러 온 게 맞지?”
“아니, 자네도 알잖아. 왜 없는 사실을 지어내려는 거야?”
“물론 나도 알지. 난 내가 말을 지어내는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거든. 단지 자네가 쓸쓸히 집에 돌아가도 비타민 말고 자네를 반겨줄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야. 왜 술을 끊었는지 말해 봐.”
“성공할까 봐 두려웠거든.”
“무슨 성공?”
“죽는 거.” 내가 대답했다.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시가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 p.104~105
바람이 그의 수염을 뒤흔들고 치아 사이에 느슨하게 물고 있는 시가 끝을 더 붉게 만들었다. 이 도시가 우리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조금씩 아리아나를 생각하는 일도 힘들지 않게 되었다.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도시에서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며, 슬플 수는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면 그녀를 보고 싶었다.
--- p.114
바다는 광활하고 거대하고 어두웠다. 부두 끝에 가서 앉았다. 주위는 온통 바다로 가득했고, 파도가 해안으로 온몸을 던져 부서지고 저 멀리 어둠 속에서 어선들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 옛날 카바피스의 말이 옳았던 걸까? 그가 말하기를 당신이 속한 도시가 바로 자신의 모습이며, 당신을 위한 배도 도로도 없기에 다른 곳에서 희망을 품지 말라고, 이 세상 작은 구석에서 인생을 낭비한 것처럼 그 어느 곳이라고 해도 당신의 망가진 인생은 달라질 것이 없다고 했다. 그 옛날 카바피스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집에 두고 온 여행 가방을 떠올리며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뭐, 나는 내가 와야 할 곳에 왔고, 이제 남은 것은 집에 돌아가는 일뿐이었다.
--- p.126~127
“앉아 있어요. 가서 사람을 불러올게요.” 내가 말하자 그가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누구를 부를 건데? 부를 사람 아무도 없어.” 그가 울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가 있을 세상은 없어! 이제 그런 세상 따위는 없다고!” 그러고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큰 울음을 터트렸고, 그 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지며 메아리쳤다. 나는 너무 놀라 가만히 그를 바라봤다. 맙소사,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는 걸까? 나는 본능적으로 화장실 문을 향해 뒷걸음질을 쳤다.
“저는 돛을 올려야겠어요.” 내가 말했다. 복도로 나가자 나폴레옹 병사가 굉장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서 누구 좀 불러와 주세요.” 나는 병사에게 말한 뒤 출구 쪽으로 향했다. 건물 밖으로 나온 나는 햇볕을 쐬려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물 알파 로메오를 타고 나보나광장으로 출발했다.
--- p.146
“난 정말 자기를 걱정했어.”
“알았어, 알았다고. 그래서 나와 뭘 하고 싶은데? 브리오슈가 먹고 싶은 거야? 아니면 바다를 보러 가고 싶어? 어쨌든 난 잘 거야. 남의 피뢰침 노릇 해 주기 지쳤어.”
내가 이런 말들을 쏟아내는 사이 그녀의 눈동자에는 다시 눈물이 가득 찼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서 그녀를 보지 않으려고 벽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누웠다. 그녀도 나를 보는 것이 힘들었는지 불을 꺼버렸고, 방안은 순식간에 달빛으로 채워졌다. 얼마나 멋진 밤이었던가.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산들바람과 아련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의자에서 꼼짝하지 않았고, 나 또한 그녀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꿈으로 가득한 얕은 잠에 들 때까지 거의 밤을 지새웠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잠에서 깬 나는 그녀가 있던 쪽을 바라봤다. 의자는 비어 있었고, 방에서는 희미한 라일락 향기가 풍겼다.
--- p.158~159
“레오, 무슨 일이야?” 그라지아노가 물었다.
“지쳤어.” 내가 말했다. “너무 피곤해.”
“온 세상이 다 그래.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그가 말하고는 주머니에서 스카치 병을 꺼내 한참 동안 꿀꺽꿀꺽 마셨다. 그러고는 잔뜩 인상을 쓰고 술병을 바라봤다. “이 흥분제는 나를 점점 더 작게 만든단 말이야.” 그리고 술병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런 불행이 또 있을까.” 황량한 광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가 계속 말했다. “나도 아리아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아.”
--- p.178~179
8월 중순이 되자 제비들이 사라졌다. 제비들이 이렇게 일찍 떠난 것은 처음이었다. 석양 무렵 내가 바람을 쐬러 발코니로 나가면 하늘은 텅 비고 고요했다. 신문에서는 도시를 짓누르고 있는 유독성 대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유치한 합리화였다. 진실은 높은 곳에서 봐야 잘 보이는 법이다. 나는 책도 읽지 않고 극장에도 안 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신문사에 출근할 시간을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내가 유일하게 자부할 수 있는 것은,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밸런타인도 한 병 사서 탁자 위 잘 보이는 곳에 두고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중 9월을 열흘 남겨두고 아리아나의 편지를 받았다.
--- p.192~193
바다는 진줏빛을 띠고 있었다. 점점 짧아지는 하루가 너무 슬프게 느껴졌다. 돌이킬 수 없는 무엇인가를 돌이키고 싶은 마음이랄까.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안은 채 혹독했던 여름이 가라앉을 9월을 생각했다. “왜 내게 데리러 오라고 한 거야?” 내가 물었다. 그녀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다가 입을 열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게 맞아, 미안해.”
--- p.200~201
내가 지내 본 모든 호텔 중 캄포 데이 피오리 뒤에 있는 곳이 가장 괜찮았다. 저녁이면 밖으로 나와 골목길을 걷고, 텅 빈 고요한 광장을 지나는 것도 좋았다. 이곳은 5세기 전 선견지명이 있는 건축가들이 엄격한 교황들의 명령대로 건설한 돌로 만든 이 도시의 오랜 심장이었으며, 건물 사이에 끼어 있는 너무 많은 수의 교회들이 석회화된 모습을 드러내며 하늘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낮 동안 이 동네는 개미굴 같지만, 저녁 무렵에는 강의 수위보다 아래에 있다고 느껴졌으며, 집들의 벽에서 고대 홍수의 수위를 증명하는 날짜가 적힌 돌비석을 볼 수 있었다. 아주 높은 제방으로 둘러싸여 홍수로부터 보호받고 있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동네는 무척 건조했다. 건물 벽에 커다란 균열이 파고들고, 회벽이 벗겨졌으며 거리를 걷다 보면 창문 너머로 집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천장이 조각나 떨어지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아틀리에의 장인들은 항상 무엇인가를 수리하고 있었다.
--- p.224
나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고 그녀도 입을 꾹 다물었지만, 우연히 손이 닿았을 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꼭 잡은 것을 보면 그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내 손 안의 그녀의 손은 아주 작고 아주 차가웠다.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흐려지더니 하얗고 뿌연 얼룩처럼 멀어졌고, 그녀의 얼굴만이 내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 p.232
창밖으로 주택가 건물들의 지붕과 강변을 따라 늘어선 나무들, 교회 첨탑들이 보였다. 저 멀리 꺼져가는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녀가 팔로 내 가슴을 감싸고 등에 머리를 기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기 살 빠졌구나.” 그녀가 말했다. “그걸 이제야 알았네.”
--- p.237
택시기사가 어디로 갈 건지 내게 물었다. 호텔은 멀지 않았고, 걷고 싶었다. 택시비를 지불하고 걷기 시작했다. 비가 몇 방울 다시 떨어졌고, 도시는 먼지 냄새를 풍겼다.
--- p.241~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