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인권의 신장을 가로막는 논리의 뿌리를 찾다 보면 ‘어린 사람은 미성숙·부족하다’라는 인식과 마주한다. 속된 말로 ‘어린 것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들’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인식이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성숙한 청소년도 있다’ ‘어린이라고 해서 모두 미숙한 것은 아니다’라고 맞받기도 한다. 이런 대화의 맹점은 그 저변에 ‘성숙해야만 인권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인권은 성숙한지, 미성숙한지를 따져 보장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성숙하다고 인정되는 존재만 인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라고 말하는 세상 질서를 과감히 부수고 바꿔나가는 것, 이것이 청소년인권운동이 가고자 하는 길이다.
--- p.7, 「들어가는 말」 중에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어린이날의 의미는 그저 ‘어린이를 아끼고 사랑하자’ ‘어린이날에는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고 잘 놀아주자’ 정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물론 100여 년 전 어린이날의 주장을 돌아보는 언론 기사가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역사적 사실을 조명하는 데 그쳤을 뿐 오늘의 사회 의제로 공론화하지는 못했다. 이른바 ‘100여 년 전 어린이날의 주장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는 잘 실현되고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같은 논의나 실천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 p.16, 「1장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주시오.”」 중에서
이전에도 노키즈존을 둘러싸고 찬반 논란은 있었다. 하지만 보통 ‘무개념 부모’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양육자들이 갈 곳이 없다’는 문제로 이야기되곤 했다. ‘아이들’은 부모가 데려왔다는 생각이 있기에 ‘부모들의 문제’로만 여겨진 탓이다. 따라서 노키즈존의 대상이 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문제로는 잘 인식되지 않았다. 이 점에서 전 작가의 일기가 한국 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주목할 만하다. “노키즈존 때문에 아이들이 상처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라는 반응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가 노키즈존을 어린이?청소년의 권리에 관한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준다. 이 일기는 “아빠! 왜 개와 유대인은 가게에 들어갈 수 없어요?”라는 문장으로 끝맺는다.
--- p.40, 「1장 어린 사람은 아랫사람이 아니다: ‘NO 노키즈존’의 세상을」 중에서
‘미래 세대’라는 말은 청소년을 현재 사회에서 배제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미래를 준비하는 ‘예비 인력’이기 때문에 현재와는 관련이 적어 보이는 착각을 일으켜서다. 하지만 청소년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온갖 사회문제 역시 그들 삶에 직간접적 영향을 끼친다. 경제 상황이 열악해지면 청소년들도 노동에 나선다. ‘청소년 노동자’ 또는 ‘도제 학생’ ‘실습생’ 같은 이름으로 노동에 참여하는 청소년이 매해 수만 명 이상이기에 청소년 역시 중대재해나 산업재해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기후 위기나 감염병 유행 상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청소년은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에서 비청소년과 마찬가지로 당사자다.
--- p.77, 「2장 미래 세대이기를 강요받는 청소년들: 청소년들을 ‘미래 세대’라 부르는 사회」 중에서
연령등급을 심의하고 분류하는 기준과 체계는 얼핏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처럼 읽히는 말들과 함께 ‘유해한 내용으로부터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을 근거로 내세우지만, 결국 특정 가치관과 정치 이념에 따라 매체를 규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특히 청소년 입장에서 이와 같은 심의 절차는 사전 검열로 비친다. “다양한 영상물을 소비하는 국민에게 영화 관람, 선택을 위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나이 기준을 토대로 접근조차 할 수 없게 하는 것이 현재 등급 분류의 결과인 셈이다.
--- p.94-95, 「2장 미래 세대이기를 강요받는 청소년들: ‘19금’은 청소년 보호를 위한 걸까?」 중에서
전후관계를 생각해보면, 비청소년들이 이런 의무를 다하는지 국가가 일일이 검토한 뒤 해당자에게 기본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 권리의 보장은 의무와 책임에 대한 법률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그런데 사실 청소년 또한 생계를 위해 노동을 하기도 하고, 세금도 낸다. ‘소년법’을 제대로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청소년 역시 사법적 책임에서 무한히 자유롭지 않으며 어떤 경우에는 사법 처리 과정에서조차 비청소년은 당연히 보장받는 권리들을 보장받을 수 없는 일도 종종 있다. 사회에서 이렇게 ‘책임을 다하는’ 청소년들을 따로 골라 비청소년과 동등한 권리를 주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 p.141, 「3장 학생인권과 교육권의 회복을 꿈꾸며: 학생인권 요구하려면 의무부터 다하라고?」 중에서
시험을 학력 향상의 도구로 쓰는 것은 학생들이 시험 성적을 올리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시험을 보는 행위 자체는 학력 향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험은 다시 배우는 과정도, 이해를 돕는 과정도 아니다. 단지 학생이 성취한 것을 점수라는 지표로 환산하는 작업에 가깝다. 학생들이 성적을 높이려고 애쓰는 것은 거둔 성적에 따라 생활의 결과가 달라져서다. 시험을 못 본, 성적이 낮은 학생은 학교에서 곱지 않은 시선(매우 둥글게 말하면)을 받고, 양육자에게 혼나거나 용돈이 깎이기도 한다. 그 성적이 입시에 활용되는 것일 때는 더 치명적이다. 또 한국에서는 규격화된 시험 점수가 좋지 않으면 지능이 낮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아서 ‘머리 나쁜 사람’ 취급을 받는다. 지능이 낮은 것이나 배우는 속도가 더딘 것을 욕으로 삼는 것은 차별적이지만, 매우 흔한 게 사실이다.
--- p.184, 「3장 학생인권과 교육권의 회복을 꿈꾸며: 학력이 우선이라는 말의 함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