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향수가 아니라, 이 브랜드들이 향수 제품과 똑같은 이름으로 내놓는 핸드크림이다. 화장품이 아닌 조향 시장에 속할 때, 핸드크림은 수십만 원대 향수의 이름과 향을 나누어 가졌으면서도 훨씬 저렴한 대체품이라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향이 좋은 핸드크림’에서 향은 그저 향이 아니라 브랜드의 향기를 가리키게 된다. 그러니 어쩌면, 인기가 있는 것은 향도 핸드크림도 아닌 브랜드일지도 모른다.
--- p.17, 「세리프, 울트라라이트, 산세리프, 엑스트라볼드」중에서
만약 AI 챗봇도 로봇이라면, ‘로봇 친화형 빌딩’은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 인간이 사용하는 공간이지만, 로봇의 원리로 돌아가는 공간을 뜻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특정 업무를 로봇이 ‘해 준다’는 사실뿐 아니라, 로봇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에도 기반한다. 챗봇을 통하지 않고 회의실을 잡을 방법은 없고, 얼굴을 등록하지 않고 회사에 출입할 방법은 없다. 이는 고객 상담 챗봇을 통하지 않고는 AS를 신청할 수 없고, 맛집에 가서 ‘캐치테이블’과 같은 앱을 다운받지 않고는 웨이팅을 할 수 없게 된--- p.326) 일상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러므로 ‘루키’를 만나보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신기술이 궁금하여 1784에 가 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미 ‘로봇 친화형’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35, 「무인(無人) 시대」중에서
간단하고 완벽히 정의되는 우리의 몸은, 이 삭제의 과정을 거치며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향해 가고 있다. 내 얼굴을 놓고 신명나게 칼질을 하던 피부과 실장님처럼 바디 프로필과 퍼스널 컬러는 스스로의 몸을 칼질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한다. SNS를 가득 메운 이미지에서 삶의 이야기가 담긴 ‘진짜’ 몸은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현실의 몸은 없다. 저 멀리 하나의 답으로 향해 가는 몸들만이 작은 화면 속 이미지를 가득 채우고 있을 뿐이다. --- p.48, 「저기 있는 몸」중에서
구직 시장의 열기를 감안하더라도 이와 같은 대기업 취업의 ‘학원화’는 흡사 대학 입시 프로그램을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기묘한 구석이 있다. 꿀팁으로 상품화된 실무자의 경험은, 내가 모르는 더 좋은 노하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조바심과, 보다 효율적이고 드라마틱한 작업 과정이 있으리라는 상상을 유발한다. 디자인 실무 과정은 그렇게 커리큘럼화되고, 체크리스트가 되고, 패키지가 되어 빠르게 익힐 수 있는 ‘꿀팁’이 되었다. 그렇다면 꿀팁을 만들고 소비하는 현상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 p.57, 「꿀팁을 찾아서」중에서
시간과 공간의 자유가 곧 오늘날의 럭셔리라고 본다면, 이 새로운 형태의 럭셔리는 구매층이 정해져 있다. 어디서 일할지, 언제 일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라이프스타일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워케이션을 떠나는 사무직 근로자의 대부분은 복지 제도가 잘 정착된 스타트업이나 대기업에 다니면서 노트북 하나로 업무와 의사소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들이다. 이들은 ‘일을 잘하는 사람’을 줄여서 부르는 신조어 ‘일잘러’로 설명할 수 있다.
--- p.73, 「일잘러들의 워케이션」중에서
내가 선택하고 모은 사물로 구성된 환경, 즉 나의 사적인 공간을 내 손으로 만들어 가는 일은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꿈꾸는 활동과 같다. 꿈을 꾸며 내가 살고 있는 실제의 세계를 벗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나의 공간을 만들며 현실을 벗어나 내가 상상하는 삶을 그려낸다. 불안한 삶의 바다 한가운데서 내가 사용하고 소유할 사물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환경을 하나하나 구성하는 일은, 현실의 나를 변화시키는 일이며 내가 원하는 나를 찾고 만들어 가는 일이다.
--- p.84, 「가구, 목제 말고 철제」중에서
2000년대 그 시절 세기말의 불안은 생각만큼 위험한 미래를 데려오지 않았다. 경제 위기는 극복되었고, 밀레니엄 버그는 해프닝에 불과했다. 같은 책을 다시 읽을 때 이미 아는 결말을 향해 가며 지나쳐 온 문장들을 새롭게 즐기는 것처럼, 우리는 Y2K의 재유행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불안을 익숙한 공통의 과거를 관람하듯 설정한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자꾸만 희미한 노스탤지어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곱씹는다. 화려한 패션 아이템, 아련한 뉴진스의 디토 뮤비, 둔탁한 캠코더와 폴더폰은 다시 음미하고 있는 옛 문장들인 셈이다.
--- p.99, 「Y2K, 미래에 대한 불안과 그리움」중에서
팬데믹 이후 시장이 정말 커졌어요. 그전까지는 웹소설이나 웹툰이 영화나 드라마로 제작되는 경우는 있어도 게임으로까지 제작되는 경우는 많지 않았잖아요. 웹소설에서 작가들이 구축한 저마다의 세계와 캐릭터는 2차 저작물로 더 넓게 확산될 수도 있고, 적용 가능한 매체도 다양해요. 그에 따라 저희도 더 유연한 태도로 디자인에 임하게 됩니다. 한 작품의 일부를 디자인하더라도 가변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자주 나눕니다.
--- p.146, 「SSS급 웹소설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법: 크리에이티브그룹 디헌 인터뷰」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