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유가족들은 2023년 8월 분향소가 있는 서울광장에서 국회까지 3일에 걸쳐 삼보일배, 세 걸음마다 큰절을 하며 움직였다. 희생자들을 기리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 위해 폭우 속에 고통스러운 걸음을 이어갔다. 참사 365일이 다 되어가도록 우리는 사실 아무것도 못했다. 애통하고 미안하다.
이 기록은 그분들에 대한 위로와 사과다. 또 피해자들을 비롯해 다음 세대에게 전하는 사과이기도 하다. 이런 시대를 만들어온 어른으로서 젊은 세대에게 미안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무 잘못 없는 아이들이 진도 앞바다에서, 이태원에서 희생됐다. 정말 미안하다. 윗세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대신 묻고 파고들고 답할 것밖에 없었다. ‘내 새끼’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의 마음을 고민한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비상식이, 아이들에게 당연한 상식이 되지 않았으면 한다.
--- 「들어가는 글 ‘나는 왜 기록하는가」 중에서
우리는 왜 10·29 참사에 이토록 분노하는가? 정부의 후속 대응도 문제지만, 처음부터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됐기 때문이다. 〈뉴욕 타임스(The New York Times〉는 아예 기사 제목을 ‘확실히 막을 수 있었다(Absolutely Avoidable)’고 뽑았다. 차례로 드러나는 진실은 막연한 짐작보다 훨씬 끔찍했다. 상식있는 시민들이 다 그랬겠지만, 경찰에 급히 도움을 구하는 112에 압사 위험 신고 11건이 참사 4시간 전부터 이어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정말 견딜 수 없었다. 개인적으로 분노가 터져버렸고, 정부의 행태를 쫓아 기록을 시작한 이유가 됐다. (중략)
심지어 이태원에서 도로를 통제하던 경찰에게도 중요한 일은 따로 있었다. 경찰은 차도를 사수했다. 인도의 안전 대신 차도의 원활한 통행이 중요했다. “‘대형사고’ 무전에도… 경찰은 참사 당일 차로 확보만 집중했다”, 〈한국일보〉 11월 29일 보도에 따르면 경찰은 차도로 사람들이 밀려나오지 않도록 그들을 인도로 다시 올려 보내느라 애썼다. 이태원 파출소 건너편에 순찰차를 고정 배치해 인파가 차도로 못 내려오도록 하라는 지시까지 내렸다. 현장에서 상황을 파악하던 112상황실장이 한 일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 p.37~38, 「정부는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중에서
정지범 울산과기대 교수는 피해자 비난 현상은 자기 방어의 일환이라 설명했다. ‘방어적 귀인 이론’이라고 한다. 피해자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도 언제든지, 누구든지 피해자가 된다는 사실을 못 견디는 심리 탓이다. 피해자를 비난하며, 피해자들과 우리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 안심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N번방 사건에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하고, 세월호 참사의 유가족을 비난하고, 코로나 확진자를 비난하고, 이제는 10·29 참사 피해자를 거론한다. (중략)
이 모든 것은 “나는 달라, 나는 저런 사람들이 아니야”라는 소리 없는 외침을 담고 있다. 피해자 비난 현상에는 정치적 정당화 이론도 함께 등장한다. 현재 권력구도를 지키기 위해 피해자를 비난하는 전략 역시 맥락이 있다는 얘기다. 1984년 미국 메인대의 사회심리학 박사 사라 윌리엄스는 ‘피해자들이 현재 권력을 해롭게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현재 권력을 지키기 위해 피해자 비난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는 연구를 발표했다. 이 연구는 보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현재의 권력 관계를 지키기 위해 피해자 비난에 참여하는 경우가 진보주의자보다 더 많다고 했다.
--- p.58~59, 「책임회피를 위한 희생양 찾기」 중에서
우리는 ‘피해자다움’, ‘약자다움’의 프레임이 작동하는 사회다. 실업급여 받으러 갈 때 선글라스라도 써서 조금이라도 있어 보이면 돌 던지고 싶어하는 이들이 꼭 있다. 우리가 학교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에버랜드를 가든, 이태원을 가든, 비행기를 타든, 배를 타든 어디서든 안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깜빡하는 이들이 꼭 있다. 놀러갔다가 사고를 당해도 피해자 잘못이 아니라 인재를 막지 못한 책임을 따져야 하는데 엇나간 얘기만 한다. 피해자가 발생할 때마다 그가 생전에 얼마나 전도유망했는지, 돈 잘 버는 직업에서 잘 나가고 있었는지, 잘 생겼는지, 예뻤는지, 그래서 안타깝다고 떠드는 뉴스에 익숙하다. 가족들은 우리 애가 놀러가지 않았다고, 거기에 일터가 있었다고, 어제까지 일하다가 어쩌다 하루 간 거라고, 어느 대학을 나왔다고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항변해야 한다.
축제를 즐기다가, 터널을 지나다가, 지하차도를 지나다가 사고를 당한 이 중 누구도 잘못한 것이 없거늘 왜 그럴까?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 언제든 일상 속에서 사고를 당할 수 있다. 피해자의 잘못이 결코 아니라고, 아무것도 변명할 필요가 없다고,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왜 우리는 지켜주지 못하는가? 아직도 참사로 희생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게 만드는 것은 누구인가?
--- p.78~79, 「그날 이후, 무슨 일이 벌어졌나」 중에서
I는 검찰공화국이라는 피상적 비판 대신 언어와 논리, 방식이 완전 다른 검찰 엘리트 통치를 꼼꼼하게 복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실상 검찰청 매운맛 버전을 용산에 꾸린 이들이다. 대통령을 검찰총장으로 모셨던 검찰 사람들 아니면 어떤 주제든 ‘씨알도 안 먹히는 분위기’라고 한다. 그들은 ‘총장님’을 조직의 ‘보스’로 모셨고, 자기들만의 집권 서사를 갖고 있다. “우리 총장님께서…”로 시작하는 수난일기다. 이른바 ‘윤비어천가’의 첫 장은 항상 ‘우리 총장님’이라는 점에서 국민의힘 쪽에서 합류한 이들과 검찰 출신들의 서사는 결을 달리한다. ‘총장님 시련 겪을 때 뭐하고 있었냐’가 충성심의 밀도를 결정한다.
“검찰은 어떤 사안을 볼 때 우리 편이냐, 적이냐,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여의도 출신들의 감각과 사뭇 다릅니다. 여의도 사람들은 적이 아니라 착한 수준에서 상대를 적대시하는 정도죠. 검찰 성골들은 계속 적을 찾아요. 시민단체, 노조, 차례로 적으로 삼아 공격하죠. 대통령이 두 가지 단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전격’, 그리고 ‘압수수색’. 기습공격을 통해 적을 물리치는 게 권력 행사의 방식입니다.”
--- p.124~125, 「검찰정부는 ‘적’을 찾는다」 중에서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이 왜 정치를 더러운 것처럼 피해야 할까? 특정 정당과 엮이는 것이 불편할 정도로 정당이 신뢰를 잃어버린 것도 유감이지만, ‘탈정치’는 매우 정치적인 프레임으로 악용될 수 있다. 세월호 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유족들은 어느새 피해자가 아니라 정치꾼으로 몰린다. 죽음을 정치화한다는 시선 때문에 숨죽이면서 무력감과 좌절감에 시달려야 했다. 진심 어린 사과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것이 전부일 텐데 언제나 정치적 공방에 끌려다니곤 했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뭉치고, 유가족들이 모이고,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모든 게 정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리고 그건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굳이 이렇게 책까지 쓸 정도로 이번 사태에 진심이었던 나는 어떤가? 참사의 여러 가지 원인을 씨줄 날줄 엮듯 살펴보고, 정부 조직의 작동 방식에, 국정 운영 과정에 혹여 보완하고 바꿀 것은 없는지, 어떻게 하면 이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뭔가 바꿀 수 있을지 찾는 중이다. 결국 시스템 문제이고, 제도 문제일 수도 있고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프로세스와 철학 문제일 수도 있다. 이런 논의 과정이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 있기 때문에 혹시 피해야 하는가?
--- p.190~191, 「참사의 정치화? 정치는 나쁜 게 아니다」 중에서
24명의 사상자를 낸 오송에서는 36명이 수사 대상에 올랐다. 국무조정실은 공직자 63명에 대해 징계 조치를 요구했고, 충북도 행정부시장 등 5명의 해임을 요구했다. 약 100명의 공직자가 문책 대상인데 높으신 분들, 최고책임자들인 선출직 공무원 김영환 충북도지사와 이범석 청주시장만 쏙 빠졌다. 꼬리 자르기다. 결국 유족들이 김 지사와 이 시장을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재난안전 업무를 담당한 일선 공무원들이 모든 형사적 책임을 떠맡는 일만 반복됐다. 반성? 책임? 사과? 대통령의 호통에 따른 조치만 남았다. 그럼 다음 번에는 달라질까? (중략)
앞서 정부는 1조 5,000억 원을 들여 2021년 경찰청·소방청·해양경찰청·지방자치단체 등 333개 재난 유관 기관이 동시에 소통할 수 있는 재난안전통신망을 구축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소방과 해경, 해군이 각기 다른 통신망을 사용해 효율적 대응을 못했다는 반성에서 출발한 조치였다. 하지만 첨단기술과 예산을 다 쏟아부은 재난안전통신망은 이태원 참사 당시 제대로 활용되지 않았다. 위기관리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고, 위기관리센터를 비롯해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 p. 212~213, 「일상의 안전은 정부 책임이다」 중에서
노태강 전 차관은 한 인터뷰에서 “국민들 앞에 드러난 것 이상으로, 양심적으로 고민하고 저항했던 공무원들이 많다”는 점을 기억해달라고 했다. 지시사항 거부하다가 산하기관으로 좌천된 직원들이 너무 많아서 나중엔 사람이 없어 다시 부르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그는 공무원이 영혼을 지키려면 제도적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고 했다. 소신 있게 할 말 하다가 부당하게 공무원 신분을 박탈당해도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단다. 공무원에 대한 평가와 감시에 시민들이 개방적으로 참여하는 방안도 제안했다. 지금도 절차가 있지만 누가 참여할지는 공무원이 정하는데, 평가자 선정 자체를 민간에 맡기자고. 역시 국민 무서운 줄 알면 일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 것일까?
“영혼 없는 공무원은 위에서 시키면 옳은지 그른지 의도적으로 판단을 안 하지요. 여러 가지 불이익을 고려해서 스스로 판단능력을 닫아버리는 거예요. 국민들은 이런 공무원들이 미우시겠죠. 하지만 공무원들이 밉다고 그들이 가진 ‘공공성’까지 미워하면 안 됩니다. 일 안 하고 복지부동 하는 공무원이 있으면 국민들이 당당하게 항의하고 따져야 하지만, 공무원들이 불합리한 지시에 대해 자유롭게 자기 판단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지켜줘야 해요.”
--- p.272~273, 「영혼 없는 공무원 탓은 이제 그만」 중에서
그는 오로지 서울광장 분향소만 오간다. 서울광장 건너편 덕수궁에도 가본 적 없다. 몸도 마음도 부축할 힘이 더 필요하다. 정부 지원으로 사회복지사와 상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해 보였다. “진상규명과 사과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 일이 램프의 요정 지니에게 비는 소원만큼 판타지 같아요. 같이 가면 길이 된다고요? 사막에서 길을 만들었더니 모래바람이 다시 길을 없애는 분입니다. 이제는 길을 내는 것보다 표지석을 세우고 싶어요. 우리가 여기를 지나왔다는 표지석, 그게 특별법입니다.”
10·29 참사를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차고 넘친다. 추모 기념물이 어디에 있으면 좋겠냐는 얘기에 내가 이태원 아니냐고 반문했더니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나왔다. “대통령, 장관부터 다들 다시는 실수하지 않도록, 참사 기억공간은 용산구청, 행정안전부, 서울시청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정안전부 벽 하나에 참사 희생자들, 산재 희생자들 이름 다 새겨야 한다고 믿어요. 행정안전부라면서요. 사람 죽지 않는 게 안전이잖아요. 기억해야 할 것 아닙니까? 사고 나면 정부는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고, 유가족들은 합동분향소에서 버티고, 단식하고, 행진하고, 거리로 나오는 일이 반복됩니다. 무슨 공식 같아요.”
--- p. 314~315, 「행정의 부재로 자식을 떠나보낸 뒤」 중에서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이든 여론을 결집시키는 마당이 없어지면서 시민으로서 개인은 무력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마다 뉴스를 끊어버리고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이 가장 손쉬운 해결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꼴 저 꼴, 이놈 저놈 다 보기 싫은 마음, 서로 마음이 통한다. 하지만 다들 알고 있다. 잠시 마음은 편해질 수 있어도 그렇게 현실의 현안을 피하면 점점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은근 마음이 뜨거운 시민의 딜레마다.
우리가 지금보다 더 연결되는 방식 중 하나가 바로 민주주의다. 사람들이 외로움으로 고립되는 대신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포개도록 이끄는 것이 사실 민주주의의 기본 기능이다. 어쩌다 투표 한 번 하고, 효능감 떨어지는 선거제도에 툴툴거리는 대신 서로 연결되는 공동체를 복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도서관이나 카페, 공원 등 서로 다양한 사람들이 만나서 교류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정부와 지자체가 만들어야 한다는 노리나 허츠의 결론은 어찌 보면 소소하지만, 한편으로는 실용적이고 실질적이다. 정치를 어려운 말로 포장해 멀고 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고, 지저분해서 상종 못할 동네처럼 만드는 이들을 경계해야 한다. 만약 정부 역시 내 삶과 별다른 관계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주권자로서 정부 서비스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 p. 354~355, 「나가는 글: 왜 다정함이 필요한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