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운서는 국어학자가 아니다. 그러나 국어를 사용하는 가장 예민한 관찰자요 철저한 검수자다. 학자들이 책상 앞에 골똘히 앉아 있을 때 우리는 ‘현장’을 바삐 서성거린다. 특히 ‘말하기’와 ‘읽기’라는 기능 국어의 영역에서 본보기의 역할을 부여받는다.
---「‘여는 글’ 13쪽」중에서
‘멋쟁이’를 제외하고 대개 ‘쟁이’는 겸양이거나, 상대가 이쪽편을 낮잡아 부를 때 쓰여왔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가령 작가 스스로가 ‘글쟁이’라고 하면 겸손한 표현이 되지만, 상대가그렇게 칭하는 건 적절치 않다. 말이 많거나 말을 잘하는 사람을 얕잡아 ‘말쟁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아나운서들이 즐겨 쓴다. 그러나 타 직종 종사자가 아나운서를 이렇게 부르면 비례非禮에 해당한다.
---「‘장이/쟁이’ 61쪽」중에서
‘보’란 무엇인가? 보洑는 농사를 위해 물을 담아두는 데다. 물을 잘 조절하는 것이 관건이다. 터지면 일단 비상사태다. 봇물은 ‘이루는’ 게 아니다. 어디에 다다르거나 뭘 성취하는 것과 무관하다. ‘봇물이 터지다’만이 비유적 관용표현이다. 그리고 엄밀히 따져볼 때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써야 원뜻에 맞는다.
---「‘봇물을 이룬다고?’ 81쪽」중에서
유명세는 有名稅다. 有名勢가 아니다. 유명해서 생기는 기세가 아니라, 유명해서 치르는 불편, 부담 등을 세금에 빗댄 것이다. 따라서 유명세 다음에 ‘타다’, ‘얻다’ 등은 올 수 없다. 유명세는 ‘치르는’ 것이다
---「‘유명세’ 91쪽」중에서
일파만파一波萬波는 하나의 물결이 연쇄적으로 많은 물결을 일으킨다는 뜻으로, 잇따라 일어나는 사건의 비유로 많이 쓰인다. 말하자면 연결, 진행, 과정이다. 상태, 완료, 종결이 아니다. ‘낳다’는 후자에 가까우므로 여기에선 어색하다. 물론 명사지만 부사어 형태로 이음, 연결, 확장의 분위기를 풍겨야 자연스럽다. ‘일파만파(로) 번지다’, ‘일파만파(로) 퍼지다’ 혹은 ‘일파만파다’로 맺음말 형태로 쓰는 게 낫다.
---「‘일파만파를 낳다?’ 93쪽」중에서
영어 ‘very’에 해당하는 우리 부사는 매우 다양하다. ‘매우’, ‘무척’, ‘퍽’, ‘사뭇’, ‘썩’, ‘꽤’, ‘제법’, ‘자못’, ‘대단히’, ‘정말’, ‘참’, ‘상당히’ 등. 이것을 맥락과 상황에 맞게 잘 가려 쓰면 그것만으로도 세련된 우리말 화자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런데 유독 ‘되게’가 일상 회화에서 지배적으로 쓰인다. 언중의 자연스러운 선택 차원에서는 인정해야 하는 측면도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대충 편한 것만을 좇는 세태를 따른 것이라면 교양있는 화자로서 가려 쓰는 게 좋다. ‘되게’의 범람은 단연코 우리의 거친 말글살이의 반영이다. 가장 조악하고 비루한 ‘very’가 바로 ’되게’다.
---「‘되게’ 140쪽」중에서
안데르센의 동화 「미운 오리 새끼」. 미운 오리 새끼? 누군가의 초라한 언어감수성이 빚어낸 비극적 결과다. ‘미운 새끼 오리’였어야 했다. 단어의 위치 잡기가 이토록 막중하다. 관성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강아지, 생쥐, 송아지처럼 새끼 형태의 낱말이 따로 있는 경우를 제외하곤 단어 ‘새끼’를 그 동물 명칭의 앞에 놓아야 안정적이고 편안하다. 새끼 사슴, 새끼 호랑이 등이 그 예다. 목가적, 동화적 느낌을 주려는 목적이라면 ‘아기’가 필요하다. 아기 곰, 아기 코끼리 등으로 쓰면 된다. 이렇게 해야 어감이 예쁘다. 어류의 경우에는 ‘어린’을 붙이는 것이 좋다. ‘어린 물고기’ 정도로 쓰면 온전하다.
---「 ‘미운 오리 새끼’ 191쪽」중에서
여성 형태로만 존재하는 단어가 몇 있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모국母國이다. 할아버지의 땅 ‘조국祖國’을 쓸지언정 우리말에 ‘부국父國’은 없다. ‘태극 낭자’할 때 낭자娘子도 그렇다. 원래 처녀, 처자를 높여 부르던 말이다. 여성을 놀리듯 칭하는 일종의 멸칭蔑稱 ‘복부인’, ‘김 여사’는 이제 쓰지 않는다. 복부인은 부동산 투기를 하는 주부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었지만, 비속어와는 다른 차원에서 양성평등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김 여사 역시 운전이 서툰 여성을 얕잡고 희화화하는 낱말이다. 신문 방송에서도 몇 년 전부터 자취를 감췄다
---「여성에게만 쓰는 표현들 215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