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민은 사소한 디테일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구동치는 생각했다. 구동치 역시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가 고려하는 디테일에는 늘 이유가 있어야 했다. 디테일은 단서이거나 은유이거나 상징이어야 했다. 이영민의 이야기 속에 있는 디테일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이야기를 지루하게 만들 목적이라면 의미 있는 디테일이겠지만…… 구동치는 팔짱을 끼었다. 생략해도 될 만한 이야기가 많았다.
p. 17
구동치는 이영민의 눈을 보았다. 깊은 곳에 불안이 있었다. 그 불안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구동치는 상관하지 않았다. 눈 속의 불안은 아직 껍질을 깨고 나오기 전의 새와 같다. 불안은 자라서 공포가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을 사랑했다. 불안하지 않으면 아무도 탐정을 찾지 않을 것이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에 먹이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p. 52
눈이 내리면 모든 눈송이들을 잡아채서 녹여버리고, 날씨가 흐려지기라도 하면 대형 강풍기로 먹구름을 모두 몰아낼 기세였다. 구동치는 그런 모습이 싫으면서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런 공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정리되고 정확하게 통제되는 세상, 물건들은 있어야 할 곳에 있고 꼭 있어야 할 사람들만 있는 세상. 구동치는 그런 세상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구동치가 해야 할 일은 없어지고 말 것이었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 조각들이 마치 노블 클럽의 조작에 의해 움직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녹색 코트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p. 69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나를 둘러싼 세계와 내가 모르는 세계가 있다. 우리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확장해나가면서 내가 모르는 세계를 줄여나간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내가 모르는 세계는 늘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하게 마련이다. 구동치는 굳이 물건을 없애는 것보다는 물건의 위치를 바꾸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구동치는 두 개의 세계 모두에서 물건을 없애는 것을 풀 딜리팅full deleting이라 불렀고,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 내가 모르는 세계로 물건을 옮기는 것을 하프 딜리팅half deleting이라 불렀다. 물건을 그저 옮기는 것만으로 딜리팅이 가능한 것이다. 의뢰인의 입장에서는 풀 딜리팅이든 하프 딜리팅이든 문제 될 게 없었다.
p. 85
그들은 잠에서 깨어난다.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골목을 걸어 내려와서 절벽으로 뛰어내리는 레밍쥐들처럼 커다란 도로로 걸어간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걸어 나가는 사람들이다. 구동치의 환영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소리만 남고 모두 사라졌다. 구동치는 살기 위해서 절벽으로 걸어가는 그 사람들을 존경했다.
p. 109
배동훈의 태블릿 피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배동훈의 태블릿 피시를 없애지 않는다고 해서 구동치가 곤란해질 일은 없었다. 책임을 물을 사람은 이미 없다. 배동훈과의 계약서에는 보증인도 없다. 태블릿 피시에 뭐가 들어 있는지도 구동치가 알 바 아니다. 태블릿 피시 속에 들어 있던 정보가 세상으로 빠져나와서 큰일이 생긴다 해도 구동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할 만큼 했고, 할 만큼 했으면 그걸로 됐다. 됐다. 전부 됐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구동치는 마음을 가라앉히질 못했다. 어떻게 해서든 태블릿 피시를 찾아서 그걸 부숴버려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p. 259
비밀의 가격은 과연 얼마인가,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할 정도의 가격을 불렀다. 전략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건 딜리터로서의 윤리라고 할 수도 있었다. 비밀이 몹시 중요한 사람은 비싼 값을 치르고서라도 지키려고 든다. 가격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비밀의 등급을 낮추고, 비밀을 포기한다. 비밀의 의미를 정확히 알려주는 일, 비밀의 가격을 정확히 책정하도록 도와주는 일, 그것이 바로 딜리터의 역할이었다. 구동치가 상담비를 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물론 백기현에게는 조금 더 비싼 가격을 부르긴 했다. 포기가 쉽도록 도와준 것이다.
pp. 236~37
가끔 김인천의 책상 맨 아래 칸 서랍을 볼 때마다 기묘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 속에는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 현실에서는 잡히지 않았던 범인이 죽도록 두들겨 맞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일어나기도 했던 이야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가 그 속에 들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묘하게 흥분됐다. 딜리팅해야 할 것들을 버리지 못하게 된 건 김인천의 탓일지도 모른다고, 구동치는 생각했다. 비밀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묘한 흥분을 주는지 그때 처음 알게 됐다.
p. 290
그의 계획을 들으며 구동치는 자신의 흔적을 지우려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살아 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 구동치는 이영민의 계획이 안쓰러우면서도 무서웠다.
p. 328
구동치는 딜리팅을 시작하던 초기, 자신이라면 뭘 없애고 싶을지 생각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구동치의 유일한 비밀은 자신의 비밀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 말고는 숨길 게 없었다. 비밀을 가지고 싶지 않았다. 구동치는 비밀을 없애려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죽음 이후의 삶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딜리팅은 타인의 힘을 빌려 그 삶을 조금 바꿔보려는 것이었다.
pp. 34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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