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령不逞(불량)”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뜻으로 “불령조선인”은 “무법자이며 불순한 조선인”을 가리킨다. …… 이 ‘불령(조)선인’이라는 말이야말로, 혼란한 사회 틈새에서 거대한 살의가 되어 조선인을 덮친 것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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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무성 경보국장은 각 부?현 지사 앞으로 “도쿄 부근에서 대지진 재해를 빌미로 조선인들이 각처에서 방화하고 불온한 목적을 수행”하고 있으며 “실제로 도쿄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고 석유를 뿌려 방화하는 사람들”이 있으므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해 엄격한 단속”을 요청하는 전문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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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츠키 다리 아래 스미다구 쪽 강변에서 조선인을 10명씩 묶어 줄 세우고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서 죽였어요.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수레 선로 위에 눕힌 다음 석유를 뿌려서 태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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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야의 지역 신문인 《신아이치新愛知》에는 “우물과 농업 용수로에 독약을 타고 군중에게 폭탄을 던지며 각처에서 방화를 저지르는 불령조선인과 중국인이 맹렬히 날뛴다”, “불령조선인 1,000명과 요코하마에서 전투 개시, 보병 일개 소대의 전멸인가”, “발전소를 습격하는 조선인”, “지붕에서 지붕으로 조선인들이 방화하며 다닌다” 등의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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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반드시 탁음이 있는 단어를 말하도록 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부톤(방석)’을 ‘사후톤’으로 발음해 그 자리에서 살해된 조선인도 있었다. 내가 기차 안에서 목격한 사건. 만약 ‘주고 엔 고주 센’처럼 탁음 많은 단어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면 아마 그 노동자도 나쁜 일을 당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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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조선일본인 자경단은 이 무장 집단인 재향군인회와 소방대를 중심으로 지역의 민간인이 참여해 조직되어 독립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할 때 활용되었다. 이는 관동대지진 당시 ‘지진 자경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유사시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하도록 만든 폭력 장치의 일환으로 조직된 재향군인회가 지진 재해의 혼란 속에서 소방대 빛 민중과 연계하여 자위?자경이라는 틀을 넘어 발동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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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규제가 해제된 후에 내무성이 “유언비어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인정했음에도 일반 국민에게는 널리 알리려 하지 않았다. 신문은 ‘학살은 불령조선인의 폭동’에 대한 자위적 행동이었다는 취지의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도쿄에 계엄령이 내려진 상황에 공개적으로 당국을 비난하거나 저항적 태도를 드러내는 문단 작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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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가해와 학살을 피해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조선인들이 관부연락선을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몰려들었다. 그들을 통해 학살 사건이 조선에 알려지는 것을 우려한 총독부는 부산에 ‘구호사무소’라는 이름으로 수용소를 설치했다. 그리고 귀환한 조선인들을 그곳에 밀어넣었다. 수용소 내에서는 학살 사건에 대한 입막음을 엄격히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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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경무과장이었던 마루야마 쓰루키치의 회고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수돗물에 독약을 뿌렸다든지, 무장봉기를 몰래 계획하고 있다든지 하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고 …… 부산에서조차 일본도를 들고 수원지를 경호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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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직후인 9월 2일 《동아일보》 이상협 편집국장이 재일거류민의 가족 400명으로부터 안부를 확인해 줄 것을 의뢰받아 일본으로 향했다. …… 이상협은 지진으로 ‘압사’ 혹은 화재로 사망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조선인 “대다수는 살해당했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진심으로 사죄해야 한다”며 “사태의 진상을 진실하게 공표하고” 아울러 “폭력 행위에 가담한 자를 적절히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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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이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가 퍼진 것처럼, 원폭이 투하된 혼란한 상황에서도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의심을 샀다. “개에게 줄 약은 있어도 너희 조선인들에게 줄 약은 없다”며 치료를 거부당하는 일들이 많았다고 부연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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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군인이 대거 포진된 상인집단 ‘마스야 일가’가 김창근, 김성태 조선인 두 사람을 참수하고 또 한 사람을 상해한 “요리이 사건”의 내용은 처참하다. 이 사건은 1947년 7월, 사이타마현 요리이 경찰서의 관내 하나조노무라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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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진 발생 4일 후, 피해가 두려워 경찰서에서 보호받고 있던 28세 조선인 엿장수 구학영을, 인근 마을인 요도무라에서 몰려든 군중들이 유치장을 습격해 그를 마구 난도질해, 경찰서 현관으로 끌고 나가 숨통을 끊어버렸다. 후세 다쓰지는 요리이 사건 변론문에서 이 두 사건의 공통점으로 “조선인 한두 명은 죽여도 좋다”는, 관동대지진 학살 사건 이후의 “민족적 차별과 멸시의 관념”이 깔려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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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은 전쟁이 아니었다. 그러나 ‘불령선인의 습격’이라는 소문은 시가지의 야전과 유사한 상황을 만들어냈다. 자경단의 지휘를 맡은 재향군인회 소속 회원은 앞서 군대 생활을 통해 ‘탈감작’ 상태였고 그 아래 지시를 따른 이들은 ‘명령’에 따라 살해를 감행하기도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집단면책’ 또한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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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조선인은 어떤가요? 전 오늘까지 여섯 명을 죽였는데요.” “저 녀석, 굉장한데.” “아무래도 자기 몸을 지키려면 그래야죠, 하늘 아래 떳떳한 살인이다 보니 호쾌하게 잘도 하네.”
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에서 결성된 자경단의 팀워크에 의한 행동은, 개별 구성원의 ‘살인에 대한 불안’을 경감해, ‘살해’에 대해 “떳떳한 살인”이라고 할 정도의 ‘고양감’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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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재해 1년 후인 1924년 9월 13일, 조선인 동포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모식’이 도쿄 도즈카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300명이 넘는 도쿄 거주 조선인들이 모였고 연단 옆에는 시커멓게 그을린 죽창과 ‘피학살 동포 추모식’이라 적힌 흰색 천이 걸려있었다. 회장에는 도즈카 분서에서 파견한 경찰 약 60명이 삼엄한 경계를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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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자신이 동포의 죽음을 추모하는 모임이었다 해도 학살의 진실을 말하는 것은 금지되었고, 비판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사실 이 《아사히신문》 기사는 검열로 인해 “피??동포 추모식”과 “학살”이라는 두 글자가 복자伏字 처리되었다. 조선인 학살은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금기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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