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의 효과가 얼마나 갈 것 같아요?” ‘환자’가 물었다. “누구나 처음 아프면 이유를 알려고 해요. 아픈 이유를 알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신참 환자들은 대증요법對症療法을 우습게 알아요. 병이 잠시의 해프닝이라도 되는 듯 어깨 한번 으쓱하면 떨어낼 수 있을 줄 알죠. 하지만 결국에는 미봉책이 우리를 살게 한답니다. 고통의 주머니를 잠시 오므리는 미봉, 죽은 새 위에 얇게 덮어놓는 티슈, 딴 곳을 보는 아이의 주의를 잠깐 끌기 위한 손가락 스냅. 그 잠깐의 ‘눈 가리고 아웅’이 우리를 살린다는 것을 어떤 수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이미상, 상담방랑자」중에서
“어른이 돼서 그런 거 아닐까?”
내가 영혜에게 말했다.
“착해진 거 아니야?”
지원이 농담을 던졌다.
“난 겁이 많아져서 변한 거라고 생각해.”
영혜가 답했다. 옆에서 민조가 중얼거렸다.
“셋 다 비슷한 뜻으로 느껴지는데.”
영혜는 가끔 고어물을 좋아하던 자신을 되찾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개연성이 없어서 하위문화 취급을 받았던 고어물의 무개연성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고 했다.
“개연성이라는 게 현실에 있나?”
영혜가 말했다.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벌어졌던 안 좋은 일들을 떠올렸다. 어째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해보기도 전에 또 다른 안 좋은 일이 앞섰던 안 좋은 일을 덮어갔다.
---「임솔아, 퀘스트」중에서
우리가 다른 꿈으로 돌아가더라도
우리가 같은 꿈으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피로에 절어 있다 해도
디테일이 다른 생활이 우리를 짓누른다 해도
눈을 감은 채로도 방은 환하고
창이 많고
네가 보는 것을 나도 본다.
---「김리윤, 조명하지 않는 빛」중에서
몸과 몸이 만나고 몸이 몸을 비틀고 몸부터 몸까지 따라올 때
또다시 손바닥에 켜지는 세계
두 세계의 합일이 아사나는 아니다
그러나 모든 이래에도
어딘가에는 있다
몸과 몸 이외의 것들이 이루는 각자의 세계
고요한 고유한
손바닥이 홀로 열리는 세계
---「박세미, 아사나를 향하여」중에서
그 순간만큼은 다 잊었다. 모조리 잊었다. 지금껏 있었던 일들도,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들도. 나는 오직 달리는 말에만 집중했다. 멈출 수 없었다.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잘 모르겠다.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돌아오는 길에 몇 푼 남은 돈으로 술을 사 먹었다. 사실 자학이었다. 도무지 좋은 쪽으로는 갈 데까지 갈 수 없어서 방향을 틀어, 갈 데까지 가려는 것. 어차피 나는 또 경마를 했고 이렇게 오늘 하루를 다 망쳤으니, 조금 더 확실하게 망가지고 싶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든 확실해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이제, 더 멀리 도망치기」중에서
물론 유하나가 무언가 달라졌다고 느낄 수도 있었다. 어느 날 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나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지도 몰라. “무언가 달라졌어. 하지만 뭐가?” 그러고는 몸을 부르르 떨겠지. 문득,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만약 지금 내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다면, 그건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까? 거기에는 어떤 제목을 붙일 수 있을까? 그녀의 얼굴 위로 의기양양한 미소가 퍼져나갔다. 다시 출근을 하게 되면,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럴 자신이 있었다.
---「손보미, 빚」중에서
적당히 허스키하면서 공중을 떠다니는 듯 어딘가 비어 있는 제인의 목소리가 들리면 채팅창은 폭주했다.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었는데, 한나는 이제 누구보다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에 담긴 모호함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는 것을. 사람들은 제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얼굴은 대체로 인중까지만. 맥시멈은 콧대. 다른 채널에서 보통 유튜버의 얼굴이 보이는 위치에 제인의 가슴이 잡히도록 카메라 포커스가 맞춰져 있었다. 제인은 마치 구독자들이 존재하지 않는 듯 자신만의 시간에 집중하는 척했다. 채팅창은 책 읽듯 훑어보고 절대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악플에도 반응하지 않을 것. 마치 혼자 있는 것처럼.
---「위수정, 제인의 허밍」중에서
무인 자동차가 나를 치고 지나간다
무인 우주선이 꿈의 궤도를 돈다
나는 나로부터 점점
여긴 아무도 없네요
나는 비로소 숨을 쉬어본다
손톱과 모발이 무섭게 자란다
강성은, 미니멀라이프」중에서
우리의 세상을 위해서 죽어갑시다
절대로 자살하지 마세요
사는 게 괴롭거나 죽음이 두렵다는 이유로 먼저 죽음으로 도망가지 않고
이 삶을 끝까지 살아내는 일이야말로 동료 시민들을 위해 가져야 할 책임입니다
주어진 삶을 끝까지 누리세요 두려워하며 기다리세요
언젠가는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되리라는 희망을 버리기 위해
모든 것은 비참한 명상 속에서 끝나야 합니다
---「송승언, 영원의 고향 같은 숲, 옛 친구, 그리고 음률이 붙지 못할 다크 포크Dark Folk를 위한 몇 편의 짧은 시」중에서
멜로디는 자동차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머리 위 하늘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선재가 고개를 들자, 너울거리는 오로라의 모습이 보였다. 오로라는 초록빛에서 보랏빛으로 바뀌고 있었다. 살아 있는 생명처럼 하늘을 가로질러 오로라가 날아가는 동안 어떤 멜로디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오로라가 부르는 노래 같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 선재의 마음으로 어떤 빛이 스며들었다. 그랬구나, 그랬던 것이구나. 그렇게 선재의 마음으로 이해가 물들었다.
---「김연수, 신의 마음 아래에서」중에서
경찰차 뒷좌석에서 젬마가 중얼거린다. “어름사니, 어름사니……” 조수석에 앉은 순경이 네이버 앱을 켜고 어름사니라는 단어의 뜻을 찾아본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어른사니, 어른산이, 얼음산이…… 누군가가 얼어가고, 누군가가 비틀거린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어떤 기대와 희망……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여전히 놀라워하다니, 놀라운 일이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유주, 작별하는 각별한 사람들」중에서
우주 마지막 장르처럼
기억될 수도 기록될 수도 없는
첫 생일이 발설되었다
어둠에 매설된 작고 우주적인 빛
안미린, 첫눈의 미래」중에서
붉은 돌은 붉은 돌을 비춘다.
검은 달은 검은 달을 가린다.
맑은 말은 맑은 말을 만진다.
*
다만 그러하고 그러했고 그럴 뿐이다.
---「이제니, 맑은 물은 맑은 물을 만진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