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에 따르면 예술은 대지erde를 딛고 하나의 세계welt를 세우고, 대지를 새로운 세계의 장으로 불러세운다herstellen. 이렇게 대지는 솟아오르면서 세계를 다시 간직한다. 이러한 역동적 과정을 하이데거는 대지와 세계의 투쟁으로 설명한 바 있다. 이처럼 철학은 시적 사유의 대지가 되고, 시(예술)는 다시 대지를 박차고 오르고 하나의 세계가 된다. 지금까지 여러 철학자들의 서로 다른 개념들은 맥락과 레토릭의 차원에서 다양하게 제시되지만, 기실 앎과 제작과 실천 사이의 역동적 관계로 인간의 사회적 활동을 정의한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요컨대 이 책은 ‘철학’이라는 앎과 ‘시’라는 제작과 ‘정치’라는 윤리적 실천 사이의 관계 속에서 철학을 통해 시를 사유하고 시를 통해 철학을 넘어서는 하나의 도주선을 더듬어 보고자 하는 데 작은 의미가 있다.
---「여는 글」중에서
오늘날 디카시의 장르적 정합성은 “영상과 문자가 (대등하게-인용자주) 결합하여” 완성되는 것이지, “영상에 시가 (종속적으로-인용자 주) 결합된 것은 아니”(이상옥, 2017)라는 데 핵심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디카시가 사물을 통해 시인을 드러”낸다는 것은 “사물은 시인을 통해 말하고 시인은 사물을 통해 말하는 경지”(위의 책)를 가리킨다. 이때 날시raw poem로 명명된 디지털 카메라에 포착된 “시창작의 단초”(이상옥, 2010)라 할 수 있는 시적 영상은 문자와 결합하게 되면서 “‘날’이라는 말은 떨어져 나가고 하나의 완전한 시작품”(위의 책)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진과 시적 언어가 하나의 디카시로 완성되는 사태는 “짧은 찰나의 예리한 감각과 안목으로 영상 미학을 발굴”한다는 뜻에서의 순간예술과 이에 결합되는 “콤팩트한 시적 언어가 견고한 의미구조를 생성하며 길이 명작으로 남을 기대감을 표출”한다는 의미에서의 영속예술의 “필요충분조건을 성립시키는 형국”(김종회, 「순간예술이자 영속예술로서의 디카시」)으로 이해될 수 있다.
--- p.20
앞서 언급한 푼크툼은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에서 스투디움studium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제시한 것인데, 문화적인 약호 내에서 이해되는 길들여진 감정이 스투디움이라면, 푼크툼은 날카로운 물체에 찔린 상처라는 어원과 같이 응시자의 주관적인 시각을 가리킨다. 물론 바르트는 푼크툼의 가치에 특권을 부여하고 있지만 자크 랑시에르는 “푼크툼과 스투디움의 양극성이 ‘미학적 이미지’의 ‘이중적 시학’을 표현”(자크 랑시에르, 김상운 옮김, 『이미지의 운명』)한다고 논박한다. 즉 스투디움이라는 일차적인 문화적 약호가 없이는 이차적인 푼크툼이라는 주관적 시각도 발생하지 않는다는 감각의 정치학이 랑시에르의 미학이다.
--- p.43
디카시에서 사진과 언어는, 아니 사진 속의 오브제들과 시적 진술 내의 모든 시어들은 사실상 어떤 기관으로 분화할지 알 수 없는 ‘알’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질 들뢰즈가 유기체의 확장과 기관들의 조직화 이전의 상태를 뜻하는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s”(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김재인 옮김, 『천개의 고원-자본주의와 분열증2』)를 명시적으로 가리킨다. 이들은 각각의 언어적 밀도와 강도를 지니며 동시적으로 서로 넘나들며 온갖 변이들을 만들어낸다. 이렇게 무수한 파롤들 간에 형성되는 이음줄trait d’union(조르주 귀스도르프, 이윤일 옮김, 『파롤』)은 고정되지 않은 채로 능동적인 도주선을 확보해 간다. 그런 의미에서 귀스도르프의 말처럼 모든 파롤은 미래로 가는 문을 여는 하나의 마술어라고 할 수 있다.
--- p.51
누구에게나 대체불가능한 절대적 존재인 자신의 내면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의 의식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 되기 때문이며 그 풍경이 성립되면 이는 견고한 자의식으로 굳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 그 의식의 지층을 탐색하는 지질학자가되길 멈추지 않는다. 그의 이러한 내관內觀은 주로 자신의 시인됨과 시인됨을 지탱해 왔던 생의 시간에 대한 성찰에 바쳐진다.
--- p.129
사실 기억이란 완벽하게 공유될 수 없다. 기억은 경험의 흔적으로 극히 주관적으로 저장된다. 항시 기억은 타자(혹은 타자화된 자아)에 의해서 발생하고, 그것은 서사적 재구성과 윤색, 그리고 망각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다. 따라서 타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의 모습은 타자화된 자아의 또 다른 측면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타자의 기억 속에 나의 안부를 묻는 행위는 단순한 그리움이라기보다는 기억에 대한 탐문이다.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에 따르면 기억이란 이미지를 통해 포착된 지각에 의해서 구성된다. 이러한 기억은 물질세계의 단순한 반복과는 달리 반복을 통해 차이를 낳는다.(앙리 베르그송, 최화 역, 『물질과 기억』)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 제시된 너의 기억 속의 나에 대한 탐문은 너의 마음속에 남은 나의 이미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와 동시에 그 물음은 나의 기억 속에 남은 너의 모습과 겹치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과거는 끊임없이 재현되고 재구성되는 것이다.
--- p.135
서양철학사의 맥락에서 구조주의는 모든 존재의 본성이 실질substance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성 요소들 간의 ‘관계’에 있음에 주목하였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1950·60년대 커다란 조류를 형성한 구조주의는 당대의 실존주의의 편만한 주관성을 대체하며 억압적 사회현상의 항수恒數로서의 심층구조deep structure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철학적 토대를 마련한다. 그러나 구조주의가 가지는 이항二項적 개념에 근거한 논리는 공허한 보편성이라는 비역사성을 노정할 수밖에 없었고, 미하일 바흐친이 말하는 다성성polyphony이나 이어성heteroglossia과 같은 인간존재의 무정부주의적 가치와 주체의 역동성으로 대표되는 탈구조주의적 시각이 맹아를 틔우게 된다. 이어 데리다의 탈구축,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 들뢰즈의 유목적 사유로 상징되는 철학적 전회가 이루어진 것이 지난 세기말의 철학적 지형도였다.
---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