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객들과 서로 믿고 공감해야 하는 박물관의 교육 담당 연구사로서, 지성 대신 지식으로 능력을 채우거나 그릇된 지식으로 신뢰와 공감의 균형을 어그러뜨릴까봐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스스로를 관람하는 사람이라 여기며 전시실을 다니고 전시품을 감상한다. 이 책은 그렇게 관람객의 입장에서 본 박물관 속의 신라 이야기이다
--- p.6~7
박물관의 동선을 따라 걷는다. 이 선은 전시기획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가상의 경로이다. 기획자는 전시품을 배치하는 순서로 의도를 표현한다. 대개 역사적 시간, 문화적 주제를 축으로 동선을 만든다. 박물관의 무게감과 관람의 피로감에 항복한 관람객과 자신의 감각을 우선해 새 길을 만드는 관람객을 제외하면, 대다수는 이 경로를 신뢰하며 걷는 편이다
--- p.11~2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은 통일 이전 신라의 역사 가운데서도 마립간麻立干 시기의 역사를 비중 있게 전시하고 있다. 해당 시기 제작된 금공金工 위세품威勢品들이 가득 진열된 공간이 압권이다. 국보로 지정된 금관(191호)과 금허리띠(192호)가 전면 배치된 신라 영내의 도입부는 신라실이 품은 신라사의 주요 일면을 압축한다고 봐도 좋겠다
--- p.14~6
초입의 진열장은 번호가 1901번이다. 신라실의 진열장들은 이 1901번에서 시작되어 1932번에서 끝난다. 이 순서는 대략 3세기 대의 철기로 열려 6세기 대의 토기로 마친다. 이사금尼師今 시기의 성장세를 나라 안팎으로 크게 확장하고 6세기 대의 집권체제 정립을 직접 이끈 마립간 시기의 시·공간, 그 점진하는 구간의 중간에서 일어난 역사적 격동이 서른두 개의 투명한 유리장을 관통하며 꿈틀댄다
--- p.16
마립간 시기 신라에서 관을 쓰거나 지니고 있다는 것은 소유자가 엄격한 계층구조에서 극소수의 상위 신분에 든 존재임을 의미한다. 관은 그 자체로 상징하는 힘이 대단해서, 관을 결코 가질 수 없는 대다수의 마음을 장악하는 데 유효한 도구였을 것이다. 경주와 그 바깥 지역 사람들로 엮인 사회 서열의 정점에 금관 소유자가 앉아 있다
--- p.22
지금까지 경주에서 발견된 금관은 모두 여섯 점이다. 발견 시점을 기준으로 보면, 금관총 금관(1921), 금령총 금관(1924), 서봉총 금관(1926), 교동 금관(1969), 천마총 금관(1973), 황남대총 북분 금관(1974)의 순이다
--- p.22
마립간 그리고 그와 가까운 핵심 지배층 중 몇몇 사람들이 관을 가지거나 썼을 것이다. 특히 금관은 마립간을 배출하는 혈족 집단이 전유한 위세품을 대표한다. …… 금관은 태생적으로 ‘귀속 지위’를 누린 마립간 소속 혈족 집단 사람들뿐만 아니라 혼인 등으로 ‘성취 지위’를 얻어 왕실에 든 여성까지 소유하거나 착용할 수 있었던 듯하다
--- p.29
‘마립’과 관련하여 《삼국사기》(1145년 수찬)에서는 김대문金大問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전한다. ‘마립’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데, 국왕의 말뚝은 으뜸이 되고 신하의 말뚝은 높낮이에 따라 그 아래로 나열되는 형식에서 국왕의 지위를 나타내는 위호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 p.30
금관·금허리띠의 방을 지나면, 철기들로 가득 찬 방이 나온다. 이사금 시기의 신라, 이 시기에 진행된 성장과 관련하여 ……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 당대 최첨단 신소재인 철의 생산과 능란한 활용을 들 수 있다. 당시 신라의 핵심 지배층은 오늘날의 울산 달천 광산으로부터 철 소재를 공급받고 경주 황성동 일원에 철기 복합생산단지를 운영하면서 철기 제작과 납품을 관장하여, 나라 안팎의 권력을 높이고 키웠다
--- p.34
철기는 신라의 성장에 큰 역할을 했다. 성장은 단순히 철기를 단단하고 날카롭게 제작하여 전쟁과 농사에 잘 사용한 데서만 유발된 결과가 아니라, 사회운영 차원에서의 생산·활용 기획과 깊은 관련이 있다. 즉 제작 목적, 소재 현황, 기술 능력, 소비 규모, 공급 이익 등을 사회운영 효율에 맞춰 사람이 판단하고 인력을 직접 투입하여 목표를 달성하는 일련의 물질 생산체계가 한층 발전한 사회의 성장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 p.35
경주시 황남동 일대, ‘대릉원’으로 불리는 장소에 거대한 무덤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황남대총·천마총, 그 위로 봉황대·금령총·금관총·서봉총·서봉황대·호우총 등 황남동·노서동·노동동 일원을 대표하는 여러 무덤에는 매우 중요한 무덤 형식상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돌무지덧널무덤’이라는 점이다
--- p.40
마립간의 최대 공통점은 김씨라는 점이다. 마립간으로 즉위했으나 국왕으로 퇴위한 지증왕을 제외하면 왕비들 역시 김씨이다. 이 공통점은 박씨·석씨·김씨 세 집단 출신의 이사금들이 즉위하고 성씨가 다른 집단과도 혼인관계를 맺었던 이전 시기와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기도 하다. 그만큼 김씨 집단의 권력이 이때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국왕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며 단일 집단 지배체제를 장기간 유지했던 힘은 일시적으로 박씨 국왕이 등장한 10세기 초반까지 이어졌다. 집권과 국왕 권력을 둘러싸고 때때로 일어난 갈등은 어디까지나 집단 내부의 일이었다
--- p.43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 탄 사람 토기가 세 번째 방을 연다. 이 방은 신라실의 역사적 서사 가운데 핵심을 차지하는 마립간 시기의 문화상을 조명하고 있다. 신라실에서 조도가 가장 낮은 곳이라 많이 어둡다. 컴컴한 무덤 속에 들어선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말탄 사람 토기는 걸어 나갈 방향을 가늠하기에 적당한 자리에 앉아 있다
--- p.47
말 탄 사람 토기를 따라 들어온 방에는 금·은으로 만든 위세품이 많다. 스스로 빛을 내는 재질이며, 세월이 지나도 색을 잘 지킨다. 방이 무덤처럼 꾸며져 상대적으로 금·은의 빛깔은 더욱 두드러진다. 깜깜한 무덤 속 정해진 위치에서 크게 빛을 발한 위세품들을 매개로 사후의 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원료는 구하기 어렵고 가공이 복잡하며 세공도 까다롭다. 이런 성질에 사람들은 높은 가치를 매겼고, 이 값어치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 p.50
일제강점기 돌무지덧널무덤 조사는 역사의 형색을 갖춘 정치가 땅을 파헤친 사건들이다. 조사 내용과 결과가 정식 보고서로 간행된 건수도 손에 꼽힌다. 발굴 자료와 출토 유물들은 일본 각 대학의 연구실·박물관과 수집가의 수장처로 흩어져버렸다
--- p.54
일제강점기 조선이 빼앗겼던 것은 ‘들’만이 아니었다. 서봉총은 1926~1929년 동안 발굴·조사되었지만 조사 기록도 없고 보고서도 간행되지 않았으며 출토 유물은 시련에 휩싸였다
--- p.57
황남대총은 마립간 시기 지금의 경주시 황남동에 조영된 ‘큰’ 무덤이다. …… 황남대총은 남북 방향의 무덤 두 기가 의도적으로 연결된 무덤이다. 남북 길이는 120미터, 동서 지름은 80미터, 남분 높이는 21.9미터, 북분 높이는 22.6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무덤이다. 무덤 규모·구조, 부장 수준·수량이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가운데 단연코 으뜸인 만큼, 무덤의 주인공들은 살아생전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 않았을까 싶다. 출토된 금제 복식들의 화려한 면면만 봐도 그들의 신분과 지위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
--- p.64~5
당시 신라 사회에서는 신분·지위의 차등, 출신 지역의 차별을 기준으로 정치·사회적 권리가 엄격하게 구분되고 있었다. 이런 흐름에서 한편으로 경주의 지배층은 차등과 차별이 제도로 완전히 정립되지 못한 틈을 타고 주변 지역 지배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경쟁을 조정하거나 귀속을 절충했다. 이는 신라의 성립 이후 지속적으로 경주의 유력 집단들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권력관계를 맺고 협의로 이 관계를 유연하게 유지해온 이력의 연장이기도 하다
--- p.74
죽음 너머의 길을 걷는 금령총의 말 탄 사람 토기를 지나면, 은관을 시작으로 신라 지배층의 각종 위세품들이 시선을 끈다. 그들은 금·은 등의 희귀 재료로 대관·모관·관꾸미개·귀걸이·목걸이·가슴 장식·허리띠·팔찌·반지·신발 등의 착용 복식과 칼·화살통 등의 착장 기물, 그릇·방울 등의 소품 등을 지녔다. 위세품은 지배층이 기본적으로 자신의 신분과 소속을 과시하고, 자기 지위와 권위를 그것의 소유가 거의 불가능했던 사람들과 확실하게 분별하는 데 효과적인 매체였다
--- p.82
맞가지 세움 장식과 엇가지 세움 장식으로 구성된 금관은 마립간 시기 동안만 한정 제작된 위세품이지만 신라 역사 천년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로 공인받고 있다. 제작 시점으로 보면 현재까지 발견된 금관들 가운데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관이 가장 일찍 만들어졌다
--- p.87
중요한 증거가 아주 드물게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부는 1921년 금관총에서 출토된 세고리자루 큰칼을 보존 처리했다. 담당자가 큰칼의 상태를 면밀하게 관찰하며 처리하다가, 칼집 끝에서 몇 개의 명문들을 찾아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글자가 ‘이사지왕·斯智王’이다. …… 무덤 내에서 인명이 표시된 자료를 발견하는 사례가 귀하디귀한 신라였기에 명문은 마립간 시기 역사 연구를 창의적으로 이끌 실마리가 되었다
--- p.92~3
신라의 영향력이 확장되면서 영남 내륙 각지의 주요 지역사회로 경주의 토기 양식이, 뒤이어 금공 위세품이 퍼져나갔다. 경계 너머에 작동할 정도로 강한 권력에 의해 경주의 물산들은 의도적으로 양산되고 제한적으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금으로 만든 굽다리접시와 투창은 아주 중요한 마립간 시기의 기호인 만큼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 된다
--- p.99~100
경주 지배층의 신분과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을수록 복식의 구성은 조밀했고 낮을수록 허술했다. 경주 바깥 각지의 유력자들도 금보다 낮은 재질의 일부 품목만 받았을 뿐이다. 이렇게 마립간 시기 신라는 특정한 복식의 규격을 잣대로 삼아 사람과 공간의 높낮이를 구별했다. 경주 주변 지역 무덤에서 발견된 금공 위세품의 구성 내역은 부장된 주인공의 신분과 지위뿐만 아니라 해당 지역의 정치적 중요도까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 p.102
실크로드 같은 국제 교류의 경로와 관련지을 수 있는 물품들도 있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금제 상감팔찌가 대표적이다. 금 알갱이와 금실로 만든 틀 안에 터키석 등의 보석을 끼워 넣어 장신구를 꾸미는 방식은 신라가 아닌 서아시아 혹은 중앙아시아 사회의 제작 기법이다. 같은 무덤에서 나온 은제 잔도 이 같은 양식의 전시품이다
--- p.107
어떤 무덤이 특정 시기에 조영되었다고 판정되더라도 무덤에는 그 주인공의 생애가 수장되므로 사람과 부장 물품들의 시간은 무덤의 조영 시점과 구별된다. 무덤 속의 역사는 무덤 이전의 삶과 흔적들을 머금고 있는 것이다
--- p.114
신라에서 이름을 날린 화가나 예술가들에 관한 기록은 변변찮다. …… 하지만 그럼에도 당대 풍속의 묘사에 뛰어난 작가들은 많았다. 바로 토우를 만든 장인들이다. 신라의 풍속작가들은 자기 자신의 마음을 곧게 드러내어 손길 가는 대로 흙을 빚었다. 능숙한 솜씨에는 꾸밈이나 막힘이 없었다. 표현은 거칠지만 사회 속의 사람과 삶, 그리고 사랑에 얽힌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의 감정들이 솔직하게 흐르고, 일상과 이상을 넘나드는 욕망이 자유로운 몸짓들로 표현되며, 세상에 나서 늙어가며 아프고 죽는 일생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 p.117~18
금공 위세품을 매개로 마립간은 지역의 경중, 세력의 강약을 따져 외부의 지배층에게 신라 기준의 계서階序를 부여하고 나라의 중심에서 지역사회를 적극 제어할 수 있게 된 듯하다
--- p.128
신라실의 한쪽 벽면 전체에 신라의 영향을 받은 그릇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다. 앞에 서면 그 힘이 온전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빠르게 도는 물레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그릇을 단단히 익히는 열기도 전해지는 듯하다. 신라의 굵은 기세는 도공의 허리 굽은 기력이 구웠다. 위력을 누가 내든, 그 힘을 몸으로 감당하는 몫은 세상의 바닥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었다
--- p.132
이사금 시기부터 신라는 최첨단의 신소재인 철을 가공하고 다양에 목적에 맞춰 철기를 제작했다. …… 마립간은 이전 시기의 생산력을 토대로, 일련의 철기 생산체계를 관영하는 권력을 적절히 구사했다. 당시 신라에서 가장 시급히 달성해야 할 생산 목표는 나라 안으로 생산에 쓸 농구와 개발에 쓸 공구, 대결에 쓸 무기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다른 지역보다 튼튼하게 완성하는 일이었다. …… 신라실 1906번 진열장 속의 칼과 창 다수, 도끼들은 이 같은 추정을 뒷받침한다
--- p.133~34
경주에서 금공 위세품의 위력이 막바지에 달한 때 조영된 보문동 합장 무덤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퇴행한 형태의 금동관 조각들이 발견되었는데, 신라실의 금동관이 그것과 서로 닮았다. 두 금동관 유물은 경주의 금동관과 관련이 있으되 전형적인 형태와는 거리가 있다. 그만큼 중앙 정부가 한때 공인했던 금공 위세품의 정치적 실효는 퇴색된 듯하다
--- p.146
율령의 초기 규정은 적어도 평상의 사람을 정치적·신분적으로 분별하고 이와 직결되는 지위의 중요도를 시각적으로 표시하면서, 그 정도에 상응하는 직무를 부여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듯하다. 곧 관등제와 골품제가 율령의 반포를 통해 정착된 제도인 것이다
--- p.149
신라실 1924번 진열장 안에 서 있는 남자 흙 인형은 최초의 율령으로부터 한 세기를 넘긴 7세기 대에 만들어져 황성동 돌방무덤에 부장되었던 전시품이다. 하지만 직물로 지은 관모와 복장의 역사적 맥락은 관습의 임의를 넘어선 율령의 기능과 이어질 것이다. 관료들은 이 규정 안에 머무르면서 집권적 체제에 종사했다
--- p.151
전시실 1927번 진열장에 배열된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들은 비록 복제품이지만 신라 중앙 정부가 지방 곳곳의 인력과 물자를 일부 지역으로 원활하게 동원하여 나라의 공간 전반을 효율적으로 운영해나간 모습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다
--- p.154
전시실에서 6세기 전반의 그릇들을 대할 때마다 여러 점을 한데 묶어 보면서, 종류와 모양, 문양 등에서 나타나는 통일성을 떠올린다. 심지어 굽다리접시의 크기가 줄어든 만큼 그릇 하나를 짓는 데 예전보다 흙을 덜 쓰고 힘도 덜 들었겠다는 상상까지 해본다. 이 그릇들은 체제와 국왕의 힘이 개혁을 거치며 사회 곳곳에 섬세하게 미친 결과물일 것이다
--- p.160
신라실 네 번째 방에서는 왕경의 정비와 불교의 공인이 6세기 전반의 사회 동향 위에서 하나의 서사로 이어진다. 기존 전통의 환기, 이렇게 정리해도 좋겠다
--- p.160~61
결과로 보면, 신라의 불교가 사회 곳곳을 엮고 사람들의 믿음을 묶으며 삼국 간의 경쟁에서 정서적인 효과를 냈던 것은 분명하다. 다만 6세기 전반 동안에는 불교가 갓 정치의 권위로 진입하여 사회의 종교로 자리를 마련하기 시작하던 터여서, 사상적으로 사람들의 생사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아 보인다
--- p.163
신라실 마지막 공간에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6세기 중엽)가 서 있다. 복제본이 아닌 원형이다. 비록 본래의 자리를 떠났지만, 당대의 신라 그리고 그 국왕이 비를 세워 높이고자 했던 의미를 반영하듯, 한강 변의 이곳 박물관에 서 있다
--- p.166
6세기 중반의 신라 순수비를 읽으며, 훨씬 단단히 뭉친 당대의 사람들을 떠올린다. 이때의 일체감은 집권체제 위의 중앙 정부가 율령과 행정 제도로 영역 전반을 통치하고, 영외의 고구려·백제와 공방하여 우위를 차지하는 데 유리한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밖으로 대적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사람은 이성의 한계를 넘는 충성심과 애국심을 발휘하기도 한다. …… 이들의 삶을 기억하며 신라실을 나선다
--- p.172
박물관은 이래서 특수하다. 사람이 역사 곳곳의 시공간에서 최선을 다해 이룬 사물들로 가득 차 있고, 관람객들은 이들을 보물로 여겨 담는다. 단번에 복선으로 사람을 휘감는, 여러 날의 시간과 여러 곳의 공간을 느낄 수 있다
--- p.178
우월한 전체보다 명석한 개인이 이 사회를 점차 점유해, 자신의 빛을 내는 관을 만들어 쓰고 홀로선 비에 행적을 새기기 바란다. 그런 희망으로 신라실을 말했다. 모두가 이 사회와 역사, 그 세상의 박물관에서 빛나는 전시품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
--- p.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