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레이쇼 그래, 그것이 오늘 밤에도 나타났는가?
바나도 아직 아무것도 못 봤네.
마셀러스 호레이쇼는 우리가 헛것을 본 거라며
우리가 두 번이나 본 그 무서운 몰골을
도무지 믿으려 하질 않네.
그래서 오늘 밤 같은 시각에
우리랑 같이 보초를 서자고 졸랐네.
그 망령이 다시 나타나면
우리말도 믿고 유령한테 말을 걸어 볼 수도 있겠지.
호레이쇼 쳇, 나오긴 뭐가 나와?
바나도 앉게,
한 번 더 얘기해 볼 테니.
우리가 이틀 밤이나 보고 하는 얘기를
전혀 믿으려 하지 않으니.
호레이쇼 좋아. 앉아서 바나도 얘길 들어보세.
바나도 바로 어젯밤에
서쪽 하늘에 있는 바로 저 별이
지금 빛나고 있는 바로 저쯤에서 빛나고 있을 때
마셀러스와 내가,
한 시를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유령 등장
마셀러스 쉿. 저것 봐, 또 나타났어.
바나도 돌아가신 선왕 폐하와 똑같은 모습으로.
마셀러스 호레이쇼, 자넨 학자이니 말 좀 걸어 보게.
--- p.58~59
레어티즈 필요한 것들은 다 실었다. 잘 있어라.
동생아, 순풍을 타고 오는
배편이 있거든 잠만 자지 말고
소식 좀 전해 줘라.
오필리어 그걸 의심하세요?
레어티즈 햄릿 왕자님이 네게 보이는 사소한 호의는
한 때의 기분이요, 젊은 혈기의 장난으로 여겨라.
이른 봄에 피는 제비꽃은 일찍 피지만
영원하지 않고 향기로우나 오래 가지 못하니
한순간의 향기요, 일시적인 위안일 뿐,
그뿐이다.
오필리어 정말 그뿐일까요?
레어티즈 그뿐이라고 생각해라.
인간은 자라면서 근육과 몸집만
커지는 것이 아니라 육체가 커지면
그 속에 깃든 마음과 정신도 함께
자란단다. 지금은 햄릿 왕자님이 널 사랑하겠지.
그리고 지금은 그 어떤 흑심이나 흉계가
그의 진심을 더럽히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분의
막중한 지위와 그의 의지가 그 자신의 것이
아님을 유념해야 한다.
타고난 신분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분이니까.
그분은 하찮은 사람들처럼 원하는 대로
할 수 없단다. 온 나라의 안녕이
그분의 선택에 달려 있으니.
--- p.80~81
햄릿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가혹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참고 견디는 것이 장한 일인가.
아니면 고통의 바다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 죽는 건― 잠자는 것.
그뿐 아닌가. 잠이 들면 마음의 상심도,
육신이 물려받는 수천 가지 고통도 끝난다고들 하지.
그것이 모두가 바라 마지않는
마무리 아닌가. 죽는 건 잠자는 것.
잠이 들면 꿈을 꿀 테지. 아, 그것이 문제구나.
우리가 이승의 고통을 버리고
죽음이란 잠을 잘 때, 어떤 꿈이 찾아올지 모르니
주저할 수밖에. 바로 그것 때문에
이리 오래 사는 재앙을 겪는 게지.
그런 주저가 없다면 누가 세상의 채찍과 모욕,
폭군의 횡포와 거만한 자의 오만불손함,
무시당한 사랑의 고통, 법의 지연,
관료들의 오만방자함, 인내심 갖춘 자가
하찮은 이들에게 받는 멸시를 참겠는가.
그저 칼 한 자루로 모든 것을 끝장낼 수
있는데? 그 누가 무거운 짐을 지고 이 지겨운 삶을 신음하며 진땀 흘리며 살겠는가.
죽은 뒤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
한번 가면 두 번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미지의 나라가 우리의 결심을 혼란스럽게 해서
알지 못하는 저세상으로 가느니
우리가 겪고 있는 이 환란을 견디게 하는 거지.
그렇게 분별심이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어
결단이 지닌 생생한 혈색은
사색의 창백함으로 그늘져서
아주 뜨겁게 타올라 실행하던 계획이
이 때문에 방향을 바꿔
실천력을 잃는 거지. 가만,
아름다운 오필리어가. 그대 숲의 요정이여,
기도할 때 내 죄도 빌어주오.
--- p.148~150
왕비 아아, 저 애가 미쳤구나.
햄릿 게으름뱅이 아들을 꾸짖으러 오셨나요?
때를 놓치고 감정도 식어 당신의 지엄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고?
아, 말씀해 보세요.
유령 잊지 마라! 이렇게 찾아온 건
무뎌진 네 결심의 날을 벼려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봐라, 네 어미가 놀라 떨고 있지 않느냐?
저 번뇌하는 영혼을 달래 드려라.
심약할수록 상상력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법이다.
햄릿, 어머니께 말을 걸어드려라.
햄릿 마마 괜찮으십니까?
왕비 아아, 너야말로 괜찮느냐?
그렇게 허공을 바라보며,
텅 빈 공기와 얘길 나누다니?
네 눈에 심한 광기가 서려 있구나.
마치 잠자다 경보 소리에 놀라 깬 병사처럼
곱게 빗은 네 머리칼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가닥가닥 곤두서고 있다. 아 착한 내 아들아,
열에 들떠 미쳐 날뛰는 네 마음을 냉정으로
다스려라. 뭘 그리 보느냐?
햄릿 아 저분, 저분요. 얼마나 창백하신지 좀 보세요.
저 모습과 원통한 사연을 들으면
목석의 마음도 움직일 겁니다. (유령에게) 그리 쳐다보지 마세요. 그런 애처로운 표정을 보면 제 굳은 결심이
꺾일까 두렵습니다. 그럼 제 할 일은
본색을 잃고, 피 대신 눈물을 흘릴 겁니다.
왕비 누구와 얘기를 하는 거냐?
햄릿 저기 아무것도 안 보이세요?
왕비 아무것도 안 보인다. 있는 건 다 보인다만.
햄릿 아무 소리도 안 들리세요?
왕비 아니, 우리 두 사람 말소리 빼고는.
햄릿 아, 저기 좀 보세요! 소리 없이 사라지고 계십니다.
아바마마가, 생전에 입으시던 옷을 그대로 입으시고!
저기 문밖으로 나가시는 걸 보십시오.
--- p.187~189
왕비 재앙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닥치는군요.
레어티즈, 그대 동생이 물에 빠져 죽었다.
레어티즈 물에 빠져 죽었다고요? 아, 어디서요?
왕비 버드나무가 물가로 기울어져 자라고
하얀 잎들이 거울 같은 물위에 비치는 시냇가가 있단다.
그 애가 미나리아재비, 쐐기풀, 데이지,
음탕한 목동들은 상스러운 이름으로 부르지만
청순한 처녀들은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라고 부르는
자주색 난초 따위를 엮어 만든 멋진 화환을
늘어진 버들가지에 걸려고 올라가다가
심술궂은 은빛 가지가 부러져서
오필리어가 들꽃 화관과 함께
흐느끼는 시냇물에 빠졌단다. 그러자 옷자락이 활짝 펴져 한동안 인어처럼 물 위에 떠 있었는데
그동안 오필리어는 옛 찬송가 몇 소절을 부르더란다.
제 불행을 모르는 사람처럼,
아니면 물에서 나서 물로 돌아가는 사람처럼.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물이 스며들어 무거워져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있던 그 가엾은 것이
진흙 바닥으로 끌려 들어가
죽었다는구나.
레어티즈 세상에, 그렇게 물에 빠져 죽었군요.
왕비 그렇게 물에 빠져 죽었다, 물에 빠져서.
레어티즈 가엾은 오필리어, 이젠 물이 지겨울 테니
눈물이 나오지 못하게 하마.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속성, 본성이 자기 습성을 고집하니
수치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 [운다] 실컷 울고 나면
아녀자 같은 이 마음도 끝나겠지. 폐하, 안녕히 계십시오. 불같이 활활 타오르는 말을 쏟아내고 싶지만 눈물 때문에 아무 말도 못 하겠습니다. (퇴장)
왕 거트루드, 따라가 봅시다.
저 애의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이 일 때문에 재발할까 두렵소.
자, 따라가 봅시다. (모두 퇴장)
--- p.23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