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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

걷는사람 시인선-106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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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12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112쪽 | 124g | 125*200*20mm
ISBN13 9791193412206
ISBN10 119341220X

카드 뉴스로 보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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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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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아오리처럼 젊었다 얼마나 흰지 모르는 채 단단한 연두로 살았다 반으로 갈랐을 때 우리는 하나가 아닌 여러 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 안에 나는 하얗게 질려 있었고 하나 안에 너는 까만 씨를 물고 있었다 우리는 모르는 척 서로를 나누어 가졌다 사이좋게 양손에 쥐고 언덕으로 달리고 달렸다 서로의 머리 위에 꼭지가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면서 뒤통수도 없이 아무 말 없이 돌아선 연두들이 머리를 짓찧으며 굴러오고 있었다
---「아오리」중에서

그러다 세탁기 앞에 까치발을 들고 더러운 양말을 꺼내 신는 아이가 떠오르고 스무 켤레도 넘는 새 양말을 머리맡에 두고 나간 사람도 툭 생각난다

죄책감에 사 온 그 양말들이 어둑어둑 모여 한밤중 경쾌하게 돌아가면 누군가 돌아오는 소리 들은 듯 평온해지고

세탁기 초인종 울리면 주인 목소리를 알아챈 강아지처럼 한달음에 달려가 베란다에 솟아오른 꽃향기를 들이마시곤 했다
---「세탁기 소리 듣는 밤」중에서

매일 살기 위해서
매일 호수를 만드는
매일 걷기 위해서
매일 호수를 짓는다
호수에 빠져들지 않기 위해서
호수에서 나오지 않기 위해서
호수를 만든다
호수를 지운다
호수를 완성한다
---「호수 만들기」중에서

이유 없이 눈물이 날 때가 있다. 마음 한구석이 부서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중략) 이상한 곳으로 질주할 것 같아 마음을 다 내놓을 때가 있다. 세상이 너무 커다란 구멍 속으로 사라져 뒤쫓아 통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 책장을 넘길 때가 있다. (중략)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아 언덕에서 굴러떨어진 적 있다. 떨어져 맨홀 속으로 들어간 적 있다. 뚜껑이 잘 닫히지 않아 다시 닫으러 올라간 적 있다.
---「홀」중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겨울에 태어나 겨울에 죽었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입을 다물 수 있어서. 죽은 사람은 죽은 뒤에 말을 꺼내고 등으로 벽을 치며 입술을 문다. 겨울은 웃지 않는 사람들의 것. 그런 사람들이 자주 뒤돌아보는 곳.

겨울에는 주머니가 자주 터진다. 길을 잘못 든다. 잘 넘어진다. 보고 싶어 사라진다. 보이지 않게 돌아선다. 내가 나를 던지지 않고 아무도 나를 밀지 않아서 눈이 떨어진다. 어깨에 떨어진 사람들이 꿈을 꾼다. 꿈에서 성벽보다 높은 난간을 바라본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다.
---「죽은 사람과 사랑하는 겨울」중에서

앞숲으로 천천히
그가 산책을 가자고 했다
가파른 길 위를 천천히
도착한 숲에는 작은 무덤이
무덤 옆에는 일인용 텐트가 있었다
들어가 향을 피우고 촛불을 켰다
우리는 숲에서 종종 피크닉을 열었다
서로의 온몸을 파먹으며
긴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
---「피크닉」중에서

같이 느낀 단 한 번의 즐거움을 쪼개고 쪼개 나빠지려 하는 마음에 이어 붙이면 조금 아물 수도 있을까. 오늘이 좋대도 내일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알 수 없지만. 다짐도 싫고 각오도 싫고 계획도 싫지만. 다만 덜 절망하고 덜 미워하며 살고 싶다. (중략) 나는 매일 달라서 오랜만에 크게 웃고 떠들며 갑갑한 껍질을 벗고 한 달에 한 번 신중하게 울며 살아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울며 살아난」중에서

많은 것을 함께하려 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모든 관계에서 하나부터 열까지라는 건 존재하기 어려운 일이다. 다섯이라도 가면 다행이니 그것으로 고마워하는 게 좋다. (중략) 어느 누구도 내 마음 같을 수 없고 그 속도도 맞을 수 없다. 그것을 인정하게 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착오를 거름으로 착각해야 할까. 아무것도 갖지 마. 내가 좋아하고 열성적으로 해 왔던 노릇도 끝나는 날이 오겠지.
---「물속에 빠뜨리면 투명해진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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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주아의 시를 읽으면 겨울의 한가운데서 도망치지 않고, 깊고 깊은 어둠을 오래 바라보고 품다가 마침내 어둠에서 눈의 흰빛을 발견하는 한 사람이 떠오른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가가고 함께 뒹굴고 “흙 묻은 울음을 꺼내 입 속에 넣고” 걷고 또 걷는 한 사람 말이다. 임주아의 시는 “물 자국처럼 사라지고 싶”(「빈집」)은 고통과 비애 속에서도 목소리를 낸다. 그것은 ‘비명’과 ‘환호성’이 같은 무게를 지녔음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다. 쉽게 울음을 터트리지 않고, 그렇다고 아픔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세상을 슬픔으로만 뒤덮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임주아의 시는 ‘살아 있음’을 본다. 치열하게 애도하며 “성실하게 빛나고/홀로 가라앉”(「산책」)는 자리에 기꺼이 가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다. 곁에 있던 사랑을 본다.
- 안미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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