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2년 9월 27일, 알레시아에서 수주일간 농성하던 베르킨게토릭스의 갈리아 군대가 카이사르의 로마군에 항복한 날이라고 한다. …… 골족이 ‘프랑스 국적을 취득’한 것은 18세기 말 즈음이다. 프랑스 학계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현대사의 출발점인 프랑스혁명기에 프랑스인들은 그들 나름의 고대사를 발굴해 냈다
--- p.15
15~16세기 프랑스 인문주의자들에게 골족은 종래 프랑크 왕 클로비스를 넘어서지 않던 프랑스의 기원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게 해주는 프랑스의 토착적 조상이었다. …… 절대왕정기 프랑스 귀족은 귀족 특권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스스로를 정복자 프랑크 전사로, 평민을 피정복자 골족과 동일시하려는 노력을 전개했다
--- p.20
프랑스의 역사서술은 대부분 클로비스(재위 481~511)로부터 시작된다. 클로비스를 초대 왕으로 하는 프랑크왕국을 프랑스 역사의 기원으로 보는 만큼 어쩌면 이는 당연해 보인다. …… ‘프랑스’라는 나라의 이름 자체가 프랑크족의 땅을 뜻하는 라틴어 ‘프랑키아Francia’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다
--- p.37
프랑크족이 왕국의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갈리아 북부 지역을 정복하면서였다. 이때 클로비스가 권력의 중심지로 삼은 곳이 바로 로마 문명의 유산을 온전히 보전하고 있던 루테티아, 즉 파리였다
--- p.39
클로비스를 활용한 카페 왕조의 정치 이데올로기는 11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장기적인 과정 속에서 다양하게 변형되고 확장되어 나갔다. …… 특히 샤를 5세(재위 1364~1380)는 ‘왕의 연주창 치료 능력’, ‘성유병’, ‘백합 문양’, ‘붉은색 왕기’를 신성한 왕권 이데올로기를 긴밀하게 구성하는 주요한 네 가지 요소로 체계화하고 이를 적극 선전하였다
--- p.54
푸아티에 전투는 ‘민족 영웅 샤를 마르텔이 이슬람 침략군을 무찌르고 프랑스와 기독교 세계를 구한 위대한 승리’라는 전형이 확립되었다. 19세기 말에 공화주의 공교육이 확립된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도 샤를의 승리는 유구한 민족사를 수놓은 주요 장면 중 하나로 늘 프랑스 역사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 p.66
샤를은 론강 유역과 프로방스 지방으로 진출해서 이슬람 세력은 물론 현지의 크고 작은 독립적인 기독교 공국들을 침공했으며 교회 재산을 약탈하고 파괴했다. 기독교 소국들은 이슬람 세력과 동맹을 맺고 프랑크 정복군에 대항하는 형국이었다. 샤를은 놀라운 용맹으로 ‘마르텔(쇠망치)’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어느새 그에게는 기독교 세계의 구원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명성이 따라다녔다
--- p.77
유럽의 탄생은 흔히 샤를마뉴제국으로 일컬어지는 프랑크제국의 건설에서 시작되었다. 여느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 제국 또한 칼로써 일으킨 정복의 결과였다. 그는 ‘새로운 다윗’이라는 찬사에 손색이 없는 ‘무적의 전사’였고 서양의 광개토대왕이라 부를 만한 ‘유럽의 정복자’였다
--- p.92
샤를마뉴는 21개의 대주교좌와 200여 개의 주교구와 수도원령, 그 두 배가 넘는 백작령, 수천에 이르는 관리를 두어 광대한 제국을 통치했으며, 로마의 법률과 행정을 본받아서 많은 법령을 제정하고 수많은 문서를 생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로마의 문화와 지식이 보존되기를 바랐고, 문예 보호자로서의 이런 바람이 ‘카롤루스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유럽 최초의 르네상스로 결실을 맺었다
--- p.99
‘유럽의 아버지’, ‘유럽의 등대’, 그를 칭송하는 이런 표현들이 후세에 나온 것이 아니라 바로 동시대 사람들의 펜과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가 의미심장한 사실이다. 어쩌면 그 시대 지식인들의 뇌리에 있던 유럽이라는 관념의 정체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p.101
13세기 중엽부터 생드니 수도원에서 펴낸 《프랑스 대연대기》는 샤를마뉴를 프랑스 민족사의 공식 기억 속에 새겨넣었다. 그는 프랑스 언어와 의복과 관습을 말하고, 입고, 따른 전형적인 프랑스 왕일 뿐 아니라, 멀리 트로이의 후예로 거슬러 올라가는 왕국의 역사에서 신기원을 연 진정한 기초자였다
--- p.105
1214년 7월 초에 존은 앙주의 로슈오무안 전투에서 줄행랑을 쳤고, 27일 주일에 그의 동맹자 오토 4세가 이끈 연합군대는 부빈에서 격파되었다. 기독교 세계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규모 병력이 동원된 부빈 전투는 전형적인 중세의 전투였다. 즉 그것은 ‘제 민족의’ 전투가 아니라 봉건적 유대로 연결된 가문들 사이의 전투였다
--- p.166
당시의 기록에서 부빈의 신화는 왕국의 통합과 민족의식 탄생의 한 단계로서 중대한 의미를 부여받았다. 부빈 전투를 전후하여 두 왕국의 역학관계는 오랫동안 수세에 있었던 카페 왕조 쪽으로 뚜렷이 역전되었다. 필리프 오귀스트가 당대의 기록 속에서 정의와 평화의 왕으로 찬양된 데 반해 패자인 존왕은 ‘검은 전설’의 주인공이 되었다
--- p.167
‘아나니 폭거’란 1303년 9월 7일, 당시 프랑스 국상이었던 기욤 드 노가레가 필리프 4세의 명으로 로마의 유력자인 자코모 시아라 콜로나와 함께 아나니에 머무르고 있던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에게 린치를 가한 사건을 말한다. 개설적인 역사서에서 이 사건은 사건 자체보다도 그 이후에 발생한 교황권의 약화와 분열, 즉 이른바 ‘아비뇽 억류’와 교회 대분열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왔다
--- p.173
필리프 4세는 …… 1296년 1월 왕국의 귀족과 성직자들에게 50분의 1 재산세를 부과하였다. 이에 대해 일부 성직자들은 성직자세까지 왕실에 바치고 있는 상황에서 새로운 과세는 과도한 부담이 된다며 불만을 표출하였다. …… 보니파키우스 8세는 1296년 2월 교령 〈클레리키스 라이코스〉를 반포하여 십일조는 교황이 이끄는 교회 조직을 위한 것이며 교황의 허락 없이 성직자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속인들에게는 파문이 가해질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 p.178
프랑스의 새 국상 기욤 드 노가레는 …… 1303년 6월 13~14일 주요 대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다시 한번 회의를 개최하였다. …… 참가자들은 보니파키우스 8세가 교황으로서 자격을 지녔는지를 심사하기 위한 공의회 소집을 제안하였다. …… 노가레가 이끄는 군대는 아나니에 당도하여 교황이 머무르고 있던 …… 교회와 별장을 모두 장악하였다. 이후 노가레는 교황에게 교황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이를 거부하며 교황으로 죽겠다고 버텼으며 이 과정에서 …… 그 유명한 ‘보니파키우스 8세가 맞은 뺨따귀’라는 이야기로 내려온다
--- p.186
결국 ‘신성하고 독자적인 프랑스 왕국’은 1302년 4월 기욤 드 노가레가 소집한 신분회에서 처음으로 ‘조국Patria’이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플랑드르군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했던 7월의 쿠르트레 전투 이후 ‘조국애amor patriae’라는 말이 등장하였다. 곧이어 ‘가장 기독교적인 왕’이 다스리는 프랑스는 ‘성지’이며 프랑스인들은 ‘선민’이라는 국가 숭배사상이 등장했다
--- p.193
에티엔 마르셀이라는 인물은 파리의 상인조합장으로서 1350년대 중엽 왕국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1358년 7월 31일 살해당한 사람이다. 이 기간 중 일어난 사건들은 반란, 개혁, 혹은 혁명으로 불리고 있다. 특히 그것은 ‘파리의 혁명’으로 불리며 자주 1789년 프랑스혁명과의 유사성이 지적되곤 한다. 일련의 사건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왕국의 재정 위기에 있다는 점, 이러한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신분회를 소집했다는 점, 이렇게 소집된 신분회가 왕권을 통제하려 했다는 점이 초기 단계에서의 유사성으로 지적되곤 한다
--- p.198
1357년부터 1358년 초에 이르는 동안 세자가 개혁을 격렬하게 반대하고 징세량의 부족으로 신분회의 개혁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마르셀은 무력에 호소하게 되었다. 2월 22일 마르셀은 자기를 지지하는 3천여 명의 무장 시민을 이끌고 왕궁으로 찾아가 세자에게 칙령 조항들을 성실하게 준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 이리하여 신분회로부터 시작된 개혁은 이제 명백한 반란의 양상으로 치닫게 되었으며, 개혁에 대해 점차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오던 귀족이 이에 대한 적대적 입장을 뚜렷이 함으로써 반란은 신분 간의 대립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 p.256
잔의 기억이 혁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공식적으로 소생한 것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집권기였다. 왕당파와 가톨릭교회, 급진적 공화파가 제각기 원한을 품고 있던 상황에서 정부로서는 국민적 단합과 군사적 힘의 상징으로 신화상의 영웅이 아니라 생생한 역사적 인물이 필요했다. 혁명의 여신이요 공화국의 상징이었던 마리안느와 달리 잔은 사회적 자유와 평등의 이상과는 무관한 좀 더 안전하고 보수적이며 영국에 대적하는 ‘프랑스 수호신’의 표상을 제공할 수 있었다
--- p.229
15세기 중반 이후 필리프 선량공과 그의 아들 샤를이 추진한 주요 정책 중 하나는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영토를 잇고자 하는 영토 통합정책이었다. 바로 이러한 영토 확장정책이 1477년 낭시 전투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 p.252
필리프 선량공의 아들이자 명성 높은 프랑스 왕실 가문의 마지막 자손인 부르고뉴 공작 샤를은 …… 스위스인들에게 대항해 싸우기 위해 로타링기아의 낭시를 향해 진군했다. 하지만 스위스인들은 강력한 힘으로 그의 군대를 급습했고, 샤를은 후퇴하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패주 중에 (그의 시신이) 사라졌다
--- p.257
마리냐노 전투 이후 10여 년 동안 프랑스에는 비교적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금의환향한 젊은 왕이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발전된 르네상스 문물은 왕국의 번영에 널리 기여했다. 1516년 프랑수아는 르네상스의 거장 다빈치를 프랑스로 초청했으며, 루아르강 주변에는 이탈리아식 르네상스 궁성들이 줄지어 들어섰다. …… 이렇게 마라냐노의 승리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개화를 알리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 p.283
1539년 8월 10~25일 프랑수아 1세가 빌레르코트레성에서 서명한…‘프랑스 왕국 전역의 사법 사안과 재판 간소화에 관한 왕령’ 중 …… 111조는 “해석에 대해 소송이 제기될 정도로 변질되어 버린” 라틴어를 사법 문서에서 배제하라는 명령이었다. …… 바로 이 조항이 프랑스어가 시골 로망어에서 왕의 언어, 왕국의 공용어를 거쳐 프랑스공화국 국어로 거듭나는 과정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기에 ……
--- p.297
혁명기 언어정책이 주창한 프랑스어의 명실상부한 국어화는 제3공화국의 학교 등에 힘입어 19세기 말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학교는 공화국의 근간이었고 학교 교육의 최우선 목표는 프랑스어의 국어화였다(“학교에서는 프랑스어만 사용한다”). 지역어(사투리 포함) 사용자는 공화국의 적이요 교권주의의 동조자라고 간주되어 모욕과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 p.315
1572년 8월 23일, 콜리니 암살 기도 사건이 벌어진 바로 다음 날, 샤를 9세는 왕실 자문들의 모임인 국왕참사회를 소집, 오랜 시간 회의를 주재했다. …… 국왕참사회의 결정은 충격적이었다. 콜리니와 그의 수하들이 왕실의 안녕과 파리의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라며 모두 숙청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 숙청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콜리니와 그의 호위병들, 그리고 잠재적 위험요소가 있다고 여겨진 위그노 귀족들에 이르기까지 50여 명 정도였다
--- p.326
민병대에 소속되어 있던 극렬 가톨릭주의자들은 드디어 왕이 이단에 대한 전면전을 선언했다고 확신했다. …… 대량학살의 기세는 8월 24일에서 최소한 8월 28일까지 파리 전역을 휩쓸었다. …… 1572년 8월 말에서 10월 말까지 프랑스 전역은 일종의 무정부 상태에 빠져들었다. 결과적으로 생 바르텔르미 학살의 핏빛 물결은 파리에서만 3천여 명, 그리고 지방에서는 3천~6천여 명 등 거의 1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나올 때까지 이어졌다
--- p.330
부르봉 왕가의 두 번째 왕인 루이 13세는 1630년 11월 10일 모친인 마리 드 메디시스와 그 주변 세력을 물리치고 현실 정치가이자 마키아벨리의 신봉자로 평가받던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를 천명했다. 당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리슐리외의 실각을 예상했기에 이날의 사건은 ‘속은 자의 날’, 즉 만우절의 에피소드로 불리게 되었다
--- p.365
이 사건은 …… 모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루이 13세의 권력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되었다. 동시에 …… 마키아벨리즘과 가톨릭 정치사상 간의 대립으로, 프랑스의 국익을 앞세우는 현실 정치와 친에스파냐적 정치의 대립으로 묘사되고 평가되었다
--- p.366
마리야크가 가장 크게 문제시한 행정 관행은 관직 매매였다. 혁명 전 프랑스에서 국가 관료는 사적으로 소유한 관직을 통해 사적 재산을 축적했다. 프랑수아 1세가 관직 매매 관리국을 창설하고 관직 매매를 제도화한 이래, 이 관행은 프랑스 왕정 구조의 한 축을 형성했다. 관직 매매는 국가권력의 세습, 나아가 그것의 재봉건화를 의미했다
--- p.375
쥘 마자랭(1602~1661)은 국무회의 강화, 지사 임명, 관직 매매의 증대 등을 통해 자신의 권한을 확대해 갔으며, 이에 파리의 고등법원과 귀족들은 자신들의 정치적?사회적 위치가 약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른바 ‘프롱드Fronde 난’(1648~1653)을 일으킨다. …… 프롱드 난은 종교전쟁 못지않게 프랑스를 피폐하게 만들었고 국민이 군주제의 지속을 염원하게 했다
--- p.389
17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려는 주체적인 민중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는 아마도 보르도에서의 느릅나무파Ormee 봉기일 것이다. …… 이들은 걸인과 하인을 제외한 21세 이상 모든 남성의 선거를 통해 구성된 의회가 프랑스의 최고권력을 위임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여기에는 양심의 자유, 외국과의 자유무역, 배심원제도 등의 안도 포함되었다
--- p.397
느릅나무파는 궁극적으로 고등법원과 시 위원들의 권력을 축소시키고 도시 운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형제회 혹은 동업조합의 규약 방식으로 오늘날 ‘사회적’이라고 부르는 조치, 즉 병든 회원에 대한 원조, 과부와 고아에 대한 부조, 무이자 대출, 실업자들을 위한 일자리 제공과 같은 사업들을 추진하고자 했다
--- p.400
섭정참사회를 구성한 …… 그들은 대부분 오랫동안 루이 14세를 보좌해 온 고위 귀족들과 관리들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 왕의 정부인 맹트농 부인의 측근이 되어 그녀의 파벌을 형성한 인물들이다. 맹트농 부인은 자신에 앞서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몽테스팡 부인의 자식인 멘 공작과 툴루즈 백작의 가정교사였다. 그녀는 그들을 키웠을 뿐 아니라 루이 14세의 총애를 얻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그녀는 자신과 멘 공작의 미래를 위해 오를레앙 공작을 허수아비로 만드는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 p.423
오늘날 7년전쟁(1756~1763)은 종종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불리곤 한다. 이 전쟁은 영국과 프랑스 간에 벌어진 소위 “제2차 백년전쟁”의 주요한 전환점으로, 영국이 프랑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해상과 식민지에서 주도권을 확립한 결정적 계기였다
--- p.435
이 “무장 평화”가 깨지면서 7년전쟁의 발단이 된 곳은 북미의 오하이오강 유역이었다. 영국 정착민들은 여기서 새로운 상업로를 확보하고 서쪽으로 팽창하기 위해 1749년 오하이오 회사를 세웠다. 프랑스 역시 누벨프랑스를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인 이 지역을 사수해야만 했다. 양쪽이 여기에 서로 요새를 세우려고 경쟁하던 중 1754년 5월 28일 전쟁의 포문을 연 사건이 벌어졌다
--- p.441
‘쥐몽빌 사건’이 전해진 후 프랑스 공론장은 이미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 전쟁은 대립하는 왕가나 종파끼리의 싸움이 아니라 두 민족 간의 전쟁으로 비쳤다는 점에서 새로웠다. 프랑스의 선동문학은 영국인들을 문명과 법의 정신을 침해하는 “야만인”으로 묘사했다. 영국인들에게 “무도하게” 살해당한 쥐몽빌의 모습은 이후 선동문학의 단골 소재가 되었다
--- p.442
양국은 …… 1763년 2월 10일에 파리조약을 맺고 마침내 7년전쟁을 끝냈다. 이를 통해 유럽뿐만 아니라 식민지까지 포함한 전 지구적 세력관계가 재편되었다. …… 프랑스는 캐나다를 포기하고, 루이지애나를 에스파냐로 넘겼다. 후자는 아바나를 돌려받기 위해 플로리다를 영국에 넘긴 에스파냐를 달래기 위해서였다. 이제 뉴올리언스만 빼고 미시시피강 우안의 땅 전체가 영국에 돌아갔고, 이로써 누벨프랑스는 종말을 맞았다
--- p.450
매우 모호하고 다양한 의미로 존재하던 민족 개념은 7년전쟁을 거치며 정치적 정당성의 원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 애국주의가 일치된 전시 노력을 강조하기 위해 ‘시민’을 소환함으로써 왕이 아니라 시민이 주체가 되는 새로운 애국주의가 부상했다
--- p.452